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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 소식

졸업성지순례-엘로라

가람지기 | 2008.10.23 16:51 | 조회 5235

9월 27일 늦은 오후 도착한 엘로라 석굴은 매우 아름다웠다. 운문사의 한여름처럼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뚝뚝 떨어지는 무더운 날씨였지만, 너무도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과 수많은 승방들, 부드러우면서도 엄숙한 부처님의 상호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10번 굴에서 인도에서의 첫 예불을 올렸다. 소리의 공명을 고려해 지어진 천장 덕분인지 우리의 예불소리는 더욱 장엄하고 우아하게 울려퍼졌다.

엘로라 석굴 사원

엘로라는 인도 마하라슈트라주(州) 엘로라 마을 근처의 석굴유적이다. 아우랑가바드의 북서 20km 지점에 있는 바위산 서쪽 사면(斜面)에 석굴 34개가 2km에 걸쳐 파여져 있다. 남쪽에서 세어 1번에서 14번 석굴은 불교사원, 15번에서 29번까지는 흰두사원, 나머지 34번까지는 자이나사원에 속해있고 불교 사원부터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 형식은 하나하나 모두 다르다.

불교석굴 사원 10굴 석굴 불상

산치탑과 같은 아쇼카 시대의 작품 속에서는 아직 인물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대신 깨달음 혹은 신성함을 상징하는 나무인 보리수를 조각하거나 탑과 상징물로 표현했지만 기원후 1세기경 인도서북 간다라 지방이 그리이스의 영향을 받은 불교에도 영향을 미쳐 인간의 모습인 붓다의 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인간으로서 깨달은 자를 의미했던 붓다 역시 점차 초월적인 존재로 신격화되면서 예배와 기도의 대상이 되어 불교의 종교화가 이루어지기 시작 되었다. 엘로라 불교석굴에서도 보리수나 탑과 같은 상징물의 석굴과 인간 모습을 한 붓다의 조각품을 볼 수 있다. 주로 3-7세기에 주로 만들어졌고(불교는 8세기에 쇠퇴하기 시작함) Vihara(비하라)는 수도승들의 수도원이고 Chaitya(차이티야)는 예배들이는 곳으로 구분하는데 대표적인 Chaitya는 10번 동굴이다.

16번 카일라쉬 힌두 석굴사원

아리안족의 브라흐마니즘이 이렇듯 왕권 강화와 맞물려 국가의 강력한 보호 아래 흰두이즘이라는 이름으로 재등장하여 급속하게 성장하니 자연 불교가 쇠퇴하고 인도인의 생활양식인 카스트제도 그리고 인도의 중심 종교. 사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인도를 배경으로 발생한 불교는 해탈의 경지로 자기 성찰에 의한 자비를 내세웠고, 흰두는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욕망에 의해 행해지는 삶과 죽음의 윤회인 카르마에 대한 해탈을 무욕으로 해석하게 된다. 이런 사상이 종교에 덧씌워져 우주를 창조한 브라흐마, 우주 유지의 비슈누, 파괴를 담당한 쉬바의 세신이 바로 무욕을 결정하는 완전한 신성이라고 생각하고 '푸라나'라는 신화 역사집을 편찬해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 가운데 브라흐마는 크게 발전하지 못했고, 비슈누를 섬기는 바이슈나비즘은 주로 북인도 지방의 대중적 종교로 , 쉬바신을 섬기는 쉐이비즘은 남인도 지방에서 성행하게 되었다. 엘로라 사원들은 7-9세기에 만들어진 브라만 동굴이다. 동굴 16번이 대표적이다. 16 석굴은 힌두교의 시바신을 모신 사원으로, 라슈트라쿠타 왕조 크리슈나 1세(재위 756∼773) 때 바위를 깎아서 만들었다. 제일 안쪽의 높이가 33m, 안까지의 거리가 54m, 정면의 길이가 46m로 시바신의 상징인 링거를 모신 본전(本殿)이다. 낭디(황소)전(殿)과 누문(樓門)이 좌우의 균형을 잡고 한 줄로 늘어서고, 거기에 회랑(廻廊)이 둘러쳐진 대규모의 것으로, 남형사원(南型寺院) 건축의 대표작이다. 그 벽면에는 시바 등의 여러 신상(神像)과 라마야나를 제재로 한 부조(浮彫)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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