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운문 소식

학감스님 기사 -매일신문 [3040광장] 산중한담

가람지기 | 2008.04.05 14:57 | 조회 4445

[3040광장] 산중한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적막한 산중에서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만약 산만 있고 나무가 없다면, 산에 나무만 있고 바람과 새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헐벗은 민둥산은 그 형체가 가관일 것이고, 나무들은 표정없이 그저 그 자리에 꽂혀진 한 개 물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맑은 바람과 고운 목청을 지닌 새들이 찾아옴으로써 나무에는 물기가 돋아 조화로운 숲을 이룬다. 그러니 바람과 새와 나무는 서로에게 반드시 필요한 이웃들이다.어찌 산속에서만의 일이겠는가. 살아가는 이치도 마찬가지다. 사람 사는 집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우편물 하나 올 데가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다정한 사람들의 따뜻한 눈길과 음성으로 인해 그 집은 생기가 돌고 생명의 빛과 향기를 발하게 된다.


이 같은 자연의 조화와 질서는 우리에게 정신적 교훈까지 전해 준다. 소나무는 서리와 눈이 내렸을 때 더욱 푸르고 성성한 기상을 보여주며 시절 따라 차고 기우는 이치까지 보여주기도 한다. 자연은 또 지친 우리들의 삶이 기대어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을 살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날 묻히거나 한 줌 재가 되어 뿌려질 곳도 역시 자연이다. 그런데 인류의 원천적인 터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자연을 무슨무슨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훼손하고 파괴하는 일들이 다반사다.


팍팍한 도시 속에서 혹은 고된 일터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되살리고자 할 때 우리는 산을 오른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를 망각하고 자연의 은혜를 모르는 무례한 사람들에 의해 산들이 망가지고 있어 안타깝다.


지금 이 순간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 땅은 단순히 우리가 두발을 딛고 살고 있는 땅이 아니라 우리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아득한 그 옛날부터 삶을 이루어 온 땅이다. 우리들의 육친과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의 피와 살이 녹아든 땅, 수많은 영혼들이 쉬고 있는 성스러운 대지다.


그러니 자연을 훼손하며 쓰레기를 함부로 버린다는 것은 우리들 조상의 넋을 쓰레기로 덮어 짓밟고 있다는 뜻이 된다. 우리들의 생활환경은 곧 우리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一心淸淨, 國土淸淨)하다는 말은 이 땅을 밟고 사는 이들이 두고두고 명심해야 할 진리이다.


한평생 산이 주는 섭리를 교훈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은 그저 단순한 자연이 아닐 것이다. 산은 커다란 생명체요, 시들지 않는 영원한 어머니의 품속 같은 곳이다. 그곳에는 꽃이 피고 지는 일만이 아니라 한편의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사상이 있고, 종교가 있다.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가 철근과 시멘트로 만든 인조 공간이 아니라 바람과 새들이 이웃이 되는 자연의 공간, 즉 숲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우리는 흔히 '인간이 곧 자연'이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구조가 곧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는 구조와 자연적 요소를 갖추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관계로 산은 곧 나 자신이 될 수 있고, 나는 곧 산이 되는 자연의 이치 속에 머물게 된다. 그래서 등산은 산 정상에 오르는 것만이 목표가 될 수 없다. 한 그루 나무와 산새소리에 감사하는 겸허한 마음가짐이 등산의 정신이 된다.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청정한 마음 닦기 과정인 것이다.


이렇듯 산을 통하여 얻게 되는 자연정신은 비단 산에 오르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나날에 해당할 것이다.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에 인생의 목적을 두기보다는 현재 자신에게 주어지는 순간순간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과정이 가장 값진 의미일 것이다.


거듭 새겨볼 일은 산 정상에 오르는 과정에서의 내 발걸음 하나하나가 소중한 자취가 된다는 것과 그 한 걸음 한 걸음은 산이 우리에게 주는 다양한 향기를 놓치지 않고 감상할 수 있을 때 더 큰 기쁨으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국토의 절반 이상이 산으로 된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은 마음만 내키면 언제나 산을 찾아 나설 수 있는 행운아들이다. 산이 주는 자연의 신비는 4계절 어느 때나 그 모습을 우리들에게 숨김없이 내맡긴다. 그 산이 주는 청정심을 우리들 마음속에 오롯이 담을 수 있도록 산을 사랑하는 청정심을 회복하기를 발원한다.


일진스님(운문사 승가대학 학감)





unnews_1207375064_35.jpg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