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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감스님 기사 -[3040광장] 날마다 좋은 날-

가람지기 | 2008.04.05 14:51 | 조회 4328

매일신문[3040광장] 날마다 좋은 날

과거는 이미 흘러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직 않은 시간이다. 그것은 곧 과거는 이미 지나간 현재이고 미래는 오지 않은 현재일 뿐 결정적인 과거나 미래라는 시간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새해가 되었다 하더라도 하늘은 여전히 늘 그 자리 그 모습인 것이다.

꽃이 피고 져도 나무는 항상 그렇게 있는 것처럼 산다는 것은 비슷비슷한 일의 되풀이일 뿐이다. 하루 세 끼 먹는 일과 출퇴근의 규칙적인 일상 속에서 오늘 내일이라는 기호가 바뀌고 있을 뿐이다. 그 속에서 때로는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안으로 가만히 살펴보면 결코 그날이 그날일 수 없다. 오늘의 나는 이미 어제의 나일 수 없으며 내일의 나는 온전히 지금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어느 한곳에 놓여 있는 바위 덩어리거나 물건이 아니고 같은 범위에서만 맴도는 시계추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끝없이 변화하면서 생성되는 생명체이므로 개인의 의지에 따라 또 그 노력 여하에 따라 그의 삶은 얼마든지 달라지고 변화할 수 있다.


雲門(운문) 선사가 보름날의 법회에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십오 일 이전은 그대들에게 묻지 않겠다. 십오 일 이후에 대해서 한마디 일러보아라." 한번 지나가버린 과거사는 묻지 않을 테니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해보라는 뜻이다. 여럿의 얼굴을 훑어 보았지만 하나같이 꿀 먹은 벙어리였다. 이윽고 선사는 자신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日日是好日(일일시호일)' 날마다 좋은 날.


하루하루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시들한 날이 아니라 늘 새로운 날이라는 뜻이다. 철저한 자기 성찰과 의지적인 노력으로 거듭거듭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에 나날이 좋은 날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 새해에는 건강하기를, 경제적으로 안정되기를, 일을 하면 수월하게 진행되기를 바라고 인간관계에서도 내게 이익이 되고 상대가 내 뜻대로 따라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지금 여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건강하기를 바라는데 병이 나서 괴롭고, 부자가 되고 싶은데 가난해서 괴롭고, 일을 잘하고 싶은데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괴로워한다. 인간관계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대화를 하고 싶은데 그러면 잘 성사가 될 듯한데 상대방은 침묵으로 일관하니 괴롭고 답답한 일이다. 이렇게 마음대로 뜻대로 되지 않는 데서 오는 일체의 불안감, 고통 같은 것을 통틀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苦聖諦(고성제) 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괴로움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 오지 않았을 것이고 괴로움이 없었다면 수행하지 않았을 것이며 수행하여 도를 이루었다 해도 괴로움이 없었다면 설법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단지 苦(고)로부터의 해탈을 가르친다"고 했다. 때문에 괴로움이 곧 삶의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괴롭고 막히는 데서 도리어 통하는 것이고, 장애 속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이치를 터득하여 삶의 큰 전환점을 맞는 계기가 된다.


지난 정해년에는 전혀 예기치 못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그 중의 하나는 학인 스님들과 자원봉사를 다녀온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고 현장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충격적인 재난 중의 재난임을 실감했다. 완전 무장을 하고 시커먼 모래사장으로 들어가는 내 심정은 막막함과 절망 그 자체였다. 사상 최악의 사고 발생은 바다에 의지해 살아온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 이보다 더 큰 절망과 고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달가량이 지난 지금 계속되는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관심과 주민들의 노력으로 절망을 서서히 희망으로 바꿔 놓았다. 12월 7일 종적을 감추었던 갈매기떼들이 다시 돌아오고 이만하면 한숨 돌리게 됐다는 주민들의 표정에서 열심히 치우고 가꾸면 언젠가는 온갖 바다 생명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


큰 역경과 막힘이 오히려 화합과 관심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될 수 있고 개개인의 삶을 한층 더 성숙시키고 행복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존귀하기 때문에 다른 이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지사다. 국민을 고루 공평하고 편안하게 하며 두루 어루만져 즐겁게 해주는 세상이 곧 국민들에게 좋은 날이다.


그렇게 모두 좋은 시절에는 전쟁을 해도 농민들은 스스로 농기구를 바치며 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선으로 달려가서 한마음이 되는 것이다. 일천여 년 전에 이미 운문 선사는 가장 사람답게 살고 가장 정법에 가까이 이르는 묘법을 갈파했으니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 법문이었다. 무자년 새해에는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이 날마다 좋은 날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일진 스님(운문사승가대학 학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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