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운문 소식

원형복원된 작압전 석조여래좌상

가람지기 | 2006.12.24 17:30 | 조회 5198

작압전의 역사

불교 정화 이후 25년 동안 보수하고 다듬어진 운문의 도량에 옛과 현재를 이어주는 조그마한 조가비 같은 모습의 작압전은 천년의 숨결을 지니고 있다. 벼리(綱)를 듦에 그물(網)코가 모두 들려오듯 이 작압전은 1400여 년을 내려오고 있는 운문사 내력을 작압이라는 단어에 일축시켜 후인에게 말없는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기 600년에 원광국사가 제1중창을 한지 303년 뒤 신라 경순왕 4년 서기 930년에 보량국사가 제2중창을 하게 된데서 오늘의 작압전이 있게 되었다.

운문사는 창건 당시는 작갑사(鵲岬寺)였다. 제2중창을 했던 보량국사가 서역과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하던 중 서해에서 용왕의 청으로 경을 설하여 주고 돌아오려 하는데 용왕이 작갑사의 옛터를 찾아 절을 지으면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고 삼국을 통일할 어진 임금이 나올 것입니다. 하는 말을 듣고 돌아와 작갑사의 옛터를 찾았다.

그러나 흔적이 없어 북쪽 고개에 올라가 내려와 보니 황금탑이 보이므로 내려와 살폈으나 흔적을 찾지 못해 다시 현 북대암에 올라가 살펴보니 찬란한 빛을 발한 황금탑 주의에 까치떼가 모여들며 땅을 쪼아대는 것을 보고 내려와 땅을 파보니 오래된 벽돌이 무수히 나와 작갑사의 옛터임을 확인하고 그 벽돌로 탑을 조성하니 남은 게 없었다 한다.

까치떼들의 도움으로 작갑사를 중창하게 된 보량국사는 까치떼를 기념하기 위해 까지작자(鵲)에 오리압자(鴨)를 써서 작압전을 지으니 때에 사람들이 작압사라 불렀으며 고려 태조가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을 내려서(937년) 이때부터 운문사라 불리웠으며 호거산을 운문산이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작압전의 위치


작압전은 일제 때 지금의 종무소 자리에서 지금의 위치인 관음전 옆으로 옮겼으며 안에는 신라시대에 조성한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317호)과 사천왕 석주(보물318호)가 봉안되어 있다. 작압전 내부에는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이 불상은 살상투가 뚜렷하며, 네모진 상체와 하체에 법의가 수직으로 무겁게 내려져 있다. 연꽃무늬가 새겨진 6각 불상 받침대좌의 특이한 형태는 다소 딱딱한 느낌을 보여준다. 손 모양은 항마촉지인으로서 다소 어색한 감이 있고 결가부좌한 양발 사이에는 부채꼴의 주름이 잡혀 있다. 이 불상은 부피감이 없고 상 자체가 나약하고 위축된 점, 조각에서 형시고하가 많이 진전된 점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조여래좌상을 회금칠했어야 했던 이유

처음 석조여래좌상은 현재 복원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옛날에는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유래가 있어서 옛날 분들은 코를 만지기도하고 때어가기도 했었다. 그런 이유로 석조여래좌상도 코가 형체가 없어 흙을 바르고 헝겁과 닭종이 등을 발라 회분칠을 했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회분칠한 것이 떨어져서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된 것이다.

석조 양 옆으로, 사천왕 석주 4개가 서있다.(보물 제318호)

이 상천왕 돌기둥은 현재 작압전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 좌.우에 배치되어 있으나, 원래는 이 곳에 세워진 탑신 4면이나 안의 벽면에 모셔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삼고저를 든 중장천왕, 탑을 든 다문천왕, 불꽃을 든 광목천왕, 칼을 든 지국천왕 등은 천의 자락이 휘날리는 갑옷을 입고 악귀를 밟고 선 자세이다.

이들 사천왕상의 높이를 보면 제1 돌기둥은 114cm, 제2 돌기둥은 118cm, 제 3 돌기둥은 128cm, 제4 돌기둥은 122cm이다. 4개의 사천왕상 돌기둥은 신체는 장대하지만 양감이 줄어든 가냘픈 체구, 부드러운 인상, 갑옷의 굵은 띠주름 등으로 미루어 보다 형식미가 진전되었던 신라 말 후삼국 시대인 900년경을 전후한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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