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부처가 되는 길_지한스님

가람지기 | 2012.03.30 14:06 | 조회 4112



부처가 되는 길


지한 / 대교과

진정한 나를 알기 전까지는 끝을 알 수없는 고독한 길에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순간의 유혹들과 나태함속에서 확신을 갖지 못한 채 흘려보낸 방황의 시간들이 졸업을 1년 남겨둔 화엄이 되서보니 나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다지는 시간이었음에 새삼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남은 1년은 함께 하는 인연들과 더 소중하고 갚지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그 고민과 방황의 시간들을 나눠보고자 ‘부처가 되는 길 ’이란 주제로 법문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절집에서 성불하십시오를 인사말 처럼 하는데 왜 부처가 되려고 하는지 생각해 본적이 있나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성불하십시오. 라는 말을 들으며 문득 부처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부처의 의미를 유식에서는 안이비설신의 6식을 통한 번뇌와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아치,아만,아견,아애라는 나라고 집착하는 7식의 번뇌가 정화되고 무의식에 저장된 오염된 8식까지 온전히 정화됐을때 거울처럼 깨끗해진 무구식, 백정식을 부처의 경지로 보고 있습니다.

이 경지가 되면 나라고 착각했던 오만하고 어리석고 이기적인 나로부터 벗어나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는데 그럼 아치,아만,아견,아애는 뭐고 7식으로부터 벗어나 8식을 정화하여 부처가 되려면 강원에서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할까요?

이것에 대한 해결에 앞서 먼저 풀어야할 과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2년전 사집구사론 수업발표준비하면서 알게된 소승아라한은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왜 소승에서의 최고 깨달은 지위인 아라한은 부처가 되지 못하는 걸까?

그러한 의문은 화두처럼 강원생활 한켠에 자리잡게 되었고 사교반이 되서 유식과 원효의 대승기신론을 배우며 소승과 대승의 차이를 알게 되면서 풀리게 되었습니다. 소승아라한의 수행법이 안이비설신의 6식까지만 단속하는 수행이라면 대승의 보살은 7식의 나라는 집착을 버리고 화두, 참선, 선정삼매를 통해 나라는 집착으로 인한 무의식에 저장된 오염된 8식까지 정화하고 나와, 너, 중생의 구분을 벗어난 우주전체의 이치를 알아야지만이 비로서 정화되서 더 이상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무구, 백정식이 되었을때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문이 풀리자 소승의 수행의 한계를 벗어나 강원에서 할 수 있는 대승의 수행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다시 고민하게 되었고 답은 이미 강원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의 생활안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위빠사나와 같은 소승아라한의 수행을 통해, 6식을 다스려 번뇌로부터 잠시 벗어났다해도 근본뿌리가 없어지지는 않는 것이기에 끊임없이 대중과의 관계속에서 어려움을 격어야 하는 강원에서의 생활은 사실 내 근본무의식이 끊임없이 자극 받는 곳이기 때문에 수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입니다.

도반들과 상하반, 스승과의 관계속에서 괴로움을 느낄수록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칠때 일어나는 내면의 감정들을 피하지 않고 맞부딪히는 것, 순간순간 일어나는 고통, 기쁨과 슬픔 등의 다양한 감정들을 피하지 않고 맞부딛치는 것이 내 무의식인 8식이 자극 받아 진정한 내안의 부처를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설프게 내면의 감정을 맞닥뜨려 지켜보기는 것만으로는 저절로 내 무의식인 8식이 정화되지는 걸까요? 물론 아닙니다.

6식과 달리 7식, 8식의 번뇌는 의식의 아주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어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어진 상황을 통해 내가 어떤 감정들로 인해 어떻게 흔들리는지 그 감정은 언제부터 그리고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뿌리까지 들여다 볼때 비로소 사라집니다.

우리가 힘들고 괴로운 이유는 나라고 하는 집착인 7식 때문인데 생활속에 내가하는 말과 생각과 행동들이 이 7식에 의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행동하면 그리고 생각에 의한 집착으로 생겨난 허망한 이 7식이 본래 실체없는 것임을 알면 자연히 사라집니다.

이처럼 내안에 흐르는 감정들을 붙잡지 않고 알아차림을 통해 자연히 흘려보낼 수 있게 되면 조금더 편하게 강원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생활속에서 무의식인 8식과 만나는 일은 조금더 쉬워 질것입니다.

이렇게 조금씩 나의 무의식을 스스로 알아차려가면서 정화해가는 과정에서 때때는 상대방의 번뇌로 인해 흔들리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땐 같이 흔들리지 말고 조금 떨어져 흔들리는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로 인해 내안에 번뇌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상대의 고통과 그 원인을 민감하게 알아차리면 더 좋겠지만 이미 내마음이 번뇌로 물들어 흔들린다면 지금 내가 상대로 인해 흔들리는 마음 또한 내것이 아님을 알고 상대의 고통을 깊이있게 들여다 보면 고통이란 감정또한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알아차려지는 동시에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고통뿐만이 아닌 상대의 고통또한 없애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수행력이 필요하겠지요. 그러한 힘을 기르기 위해 우리가 여기모여 수행하는 겁니다.

상대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우선 상대의 고통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감정을 들여다보고 알아차리는 훈련을 해야겠지요. 그러다가 흔들리지 않는 힘이 굳어지면 보여지기 위한, 내 아만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 아닌 결과로써의 자연스러운 보살행이 우러나오고 그런 보살행을 통해 오염된 8식이 정화되면서 보리심은 대승의 깨달음으로 변화하여 우리가 부처의 행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의 수행을 통한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강원생활속에서 끊임없이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인내와 정진의 힘, 때론 나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객관적인 판단력과 부족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음있는 용기와 지혜, 선정의 힘을 기르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한 마음을 염염이 끊이지 않게하고 거문고 줄 튕기듯 너무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조절해가면서 하루하루 힘을 쌓아갈 때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 탁하고 무의식이 건드려져 참된 내가 드러나면서 자유로울 수 있게됩니다. 내가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만큼 나와 같은길을 가는 동업의 인연들 또한 자유의 길을 가게 되겠지요.

물론 강원에서 뿐 아니라 졸업해서 누구와 만나고 어떤 때 어느 자리, 어느 상황에 임하더라도 자유로울 수 있는 행복의 열쇠는 아파서 힘들어 몸부림치는 그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괴로워서 영원히 피할지, 돌아서 갈지, 그 자리가 부처된 자리임을 믿고 바로 들어갈지는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행복의 문을 열 주인공은 바로 우리들이고 그 열쇠는 각자의 마음안에 있습니다.

처한 그자리가 나의 공부처, 부처되는 자리임을 믿고 그러한 선근의 힘과 선정과 지혜의 힘을 길러 생활 속에서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 의견만 맞다고 주장하는 아견인지, 나만이 잘나서 최고인 아만인지, 나만 너무나 소중해 다른 사람 입장은 생각하지 않는 아애인지, 그리고 무지한 아치인지 스스로 점검하고 알아차리면 멀리서 부처와 선지식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7식에 의해 나를 고집하는 아집을 버리고 진정으로 함이 없는 보살행을 하면서 끊임없이 불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나가다보면 번뇌로 오염된 8식이 맑아져 나와 남이 진정 하나인 도리, 우주전체가 하나로 이어지는 법공의 도리를 가슴으로 느끼게 될것입니다.

부처가 되는길,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은, 나를 떠난 다른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볼 때 중생이면서 동시에 부처인 우리자신과 만날 수 있습니다.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동자가 부처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섯듯이 이제 우리들 각자가 마음 속으로 길을 떠날 차례입니다.

여러분의 가는 길을 밝혀줄 등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육조단경의 혜능대사의 게송과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두 글귀를 끝으로 오늘 차례법문을 마치겠습니다.

내 자성이 본래 청정한 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자성이 본래 생멸이 없는 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자성이 본래 저절로 갖춰져 있는 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자성이 동요가 없는 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자성이 능히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줄 내 어찌 알았으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속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대중 스님 여러분, 수행하는 길에 영원한 밑천인 신심과 깨어있음으로 부처와 조사가 걸었던 이 자유의 길을 당당하고 행복하게 가길 바라겠습니다.
모두 정진 여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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