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나는 성장하고 있는가? 결코 유쾌하지 않지만 나를 바라본다는 수행 - 사집과 인우

가람지기 | 2018.04.15 10:22 | 조회 1586
  안녕하십니까?
벚꽃이 한창 흩날리는 운문승가대학에 들어와 수행의 목적이 같은 많은 대중스님들과 함께하여 행복한 사집반 인우입니다.

  출가해서 자주 듣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봐주지 못 하는 것은 그 허물이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란 이야기입니다. 저는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반감이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어떻게 저런 모습, 저런 생각, 저런 언어사용을 내가 용납 할 수 있겠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하면서 저와는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출가를 하고 치문을 보내면서 수도 없이 벽에 부딪힙니다. 저와 다른 도반들의 모습에 입 바른 소리 하면서 참견도 해보고, 못 본척, 못 들은척 해보기도 하고 때로는 화를 내며 자기분에 못 이겨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사집반이 되었습니다. 새 학년이 시작 된지 얼마 안 되었지만 요즘 새삼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싫어하는 그 모습들이 왜 내 모습이라고 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져 시간이 날 때마다 화두처럼 붙잡고 있습니다.

  때때로 법고를 치러 종각에 올라갈 때가 있습니다. 올라갈 때마다 저도 모르게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두들 알고 계시겠지만 종각에는 대종을 치는 시간이 표시 된 카드가 각각 새벽,  12시, 저녁 때에 맞춰 따로 준비되어있습니다. 종각에 비치되어 있는 그 카드는 오늘도 뒤섞여있습니다. 그 뒤섞인 카드를 보면서 또 마음을 일으킵니다. ‘새벽에 대종을 치고 순서대로 정리한다면 다음에 대종을 치기위해 올라온 사람이 수고롭게 카드를 뒤적이며 찾지 않아도 될 텐데...’ 라고 마음을 일으키면서 카드를 순서대로 정리하고 내려옵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무 예민한가? 나는 왜 이렇게 유난스러운가?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는 일인데, 나는 왜 스스로 생각을 내어 힘들어하는 이유는 무얼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득 가사장삼을 탈하면서 제 머리 속에서‘나는 내안의 잣대가 생겨 있지만 다른 사람은 이 일에 대한 잣대 자체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에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들에 대한 어떠한 나만의 기준이 서있다는 것! 그것은 내 안에 그 씨앗이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그 씨앗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일은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 즉 제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순간 순간 ‘내가 다른 사람의 시비를 논 할 자격이 있는가?’하고 생각해봅니다. 이젠 예전처럼 쉽게 질타하고 싫은 내색하는 일들이 조심스럽습니다.
  잘 할 수 있다고, 잘 해왔다고 생각했던 하심의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보면 쉽게 풀이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고 인정해주지 않는 것 자체가 하심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저는 하심을 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있었을 뿐 오히려 전혀 하심이 안된 사람이었습니다. 부끄러움이 온몸을 덮쳐와서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운서주굉 스님의 ‘죽창수필’에 ‘세상의 재색이나 명리의 경계에 대처’하는 것을 비유로 밝히신 글이 있습니다. 큰 불덩이가 있고 그 옆에는 다섯 가지 물건이 있습니다. 그 다섯 가지 물건은 마른 풀, 나무, 쇠붙이, 물, 허공입니다. 
  첫 번째 마른 풀과 같은 것은 불덩이에 닿기만 하면 금방 타 버리고 맙니다. 두 번째 나무와 같은 것은 바람이 불면 타 버립니다. 세 번째는 쇠붙이와 같은 것이니, 이것은 태울 수는 없으나 녹일 수는 있습니다. 네 번째는 물과 같은 것으로 이 물과 같은 것은 불로 태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불을 꺼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물은 솥에 부으면 끓여 없앨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허공과 같은 것은, 태우든 말든 본체는 항상 변함이 없으며 또한 불을 끄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꺼져버리고 맙니다. 이 다섯 가지 중 닿기만 하면 금방 타 버리는 마른 풀과 같은 것은 범부의 경계요. 나무와 쇠붙이, 물 등은 수행하는 이의 경계이며 다섯 번째 허공의 경계여야만 비로소 지불 이래 대성인의 경계라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경계에 대처하고 있을까요? 대중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대처가 잘 되십니까? 혹여 저와 같이 마른 풀로 큰 불덩이를 꺼보겠다고 바람만 일으키다가 그 불덩이를 오히려 더 키우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마른풀마저도 훨훨 태워 날려버리는 범부의 경계에서 헤매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대중 생활을 하면서 이런 저런 부딪힘 속에서 지금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 해 하루에도 몇 번씩 제 마음에는 부처님과 마라의 마음이 수도 없이 번갈아 찾아들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코 유쾌하진 않지만 나를 바라보면서 또 한걸음 더 여법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성장해갑니다.
감사합니다.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