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방하착 - 무상스님

가람지기 | 2006.12.15 13:30 | 조회 3247

보통 한철이면 몇 번은 요가 외전 수업을 받습니다. 아쉽게도 저는 지금 소임덕분으로 이번 가을철 요가외전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지난철의 기억을 되살려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먼저 요가선생님이 잘 보이는 곳에 초록색의 요가매트를 깔고, 옷은 가볍게, 자세는 바르게 하고 굳은 결심을 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어떤 동작이라도 잘 따라해야지!

평소에 굳어져있던, 혹은 쓰지 않는 부분의 몸을 많이 움직여서 이리저리 꼬아도 보고, 구부리고, 돌리고, 꺾고, 펴고, 그대로 멈추고...

그러나 잠시 후면 곧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생각만큼 잘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저녁마다 이부자리에서 나름대로 몸을 풀고 잔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로는 이 난해한 동작들을 따라하기에 너무도 많이 부족한 듯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몸을 방치한 탓이겠지요. 그중에서는 조금 잘되는 스님도 있지만 대개는 다 비슷비슷한 형편입니다. 안쓰면 굳어집니다. 잘되지 않는다고 포기하거나, 그래서 계속 쓰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쓸수없게 됩니다.

굳이 다윈의 용불용성(用不用說)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용불용설이란, 예를들면 저와 아주 비슷한 동물인 기린은, 처음엔 지금처럼 목이 길지 않았다고 합니다. 좀더 높은 곳에 있는 잎을 따먹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점차 목이 길지 않았다고 합니다. 좀더 높은 곳에 있는 잎을 따먹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점차 목이 길어져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곧 이 학설의 핵심은,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점차 발달하고 안 쓰는 기관은 점차 퇴화한다는 개념과, 일단 획득된 형질은 자손에게도 유전이 된다는 이론입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의 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이 용불용설이 적용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때나, 혹은 어떠한 생각을 할 때, 한 곳으로만, 또는 내 생각으로만 그것을 관찰하고, 행동한다면 내가 보지 않는 곳, 쓰지 않는 곳, 모르는 곳의 생각은 저도 모르게 편협되어 굳어져 버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내 잣대로만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보며, 분별에 빠지고, 망상하고, 시비하고, 번뇌하고...

나의 몸에 굳어진 자잘한 습관들, 내 머릿속에서 옳다라고 생각하고 행동해왔던 모든 일들이, 사실은 길어진 기린의 목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길어진 기린의 목이 다시 짤아질 수 있을까요? 학설상으로야 잘 모르겠지만, 저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방법을 바로, 수행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그러한 단점, 혹은 편협된 사고들을 너무도 잘 알면서 정작 고치려고하지는 않습니다. 그럴듯한 핑계들로 자기합리화를 하기에 바쁘지요. 오랫동안 굳어진 그것을 풀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잘못되었다라는 것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공부를 하는 우리는 이것을 아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상이란 것은 사실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출가해서 얼마 안되어서의 일입니다.

저희집은 대중처소는 아니지만, 상노스님, 노스님, 노스님의 사제스님, 은사스님, 사숙님, 형님, 사제스님, 행자님 등 여느 대중처소 못지않은 많은 스님들이 함께 삽니다. 그러다보니 어른스님께서 시키시는 일, 하루일과로 해야 할 일등, 하루 종일 이일 저일 하다보면 좀더 빠른 시간에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하며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나 저 나름대로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일을 시키신 어른스님이나, 혹은 같이 일하던 사제스님들의 마음에는, 제 생각을 내서, 제 마음대로 일한 것이 되어버리곤 했던 것이 마음상해서, 하루는 은사스님께 이런 마음을 털어놓았더니, 간단하게 결론을 내려주셨습니다.

무상아!

예.

그게 아상이다.

스님. 저 아상없어요. 그냥 효율적으로 잘하려고 했던 것 뿐 이에요.

야! 이놈아 아상없다고 생각하는 그게 가장 큰 아상이다.

...


그일 이후 저는 생각생각마다, 하는 일마다, 내 몸에 내 마음에 얼마나 많은 아상이 붙어있었는지 조금이나마 알아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 내가 했다는 생각, 수행자라는 생각, 스님이라는 생각, 내가 잘났다는 생각, 혹은 못났다는 생각, 남들과는 다르다는 생각..., 모두가 놓아버려야 할 아상들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방하착이란 말이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방하착(放下着)!!

놓는다는 뜻이며 집착을 의미합니다. 본래 한 이치를 알지못하고 모든 것에 걸려 집착하는 마음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히나 자연스럽게 길들여져왔던 , 내것에 끄달려서 일어난 아집(我執)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집착을 놓는 일이야말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욕망으로부터 시작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방학착이 그 첫걸음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모 강사스님의 표현을 빌자면 다겁생래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어서, 어떻게 놓아야할지, 무엇을 놓아야할지, 조금은 막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놓으면, 놓는다는 상조차 없이 놓는 연습을 한다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더디게 가더라도 바른길로 갈 수 있는, 그런 수행자가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 한마음 쉬는 것이 우리 공부의 전부일지도 모릅니다.


대중스님들, 지금부터는 우리 모두 쉬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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