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좌도 우도 아닌 중간상태 - 자안스님

가람지기 | 2007.01.24 11:16 | 조회 3266

안녕하십니까 사교반 자안입니다.

출가 전 저는 불교에 대해 전혀 이해하고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제게 어느 불교관련 책에서 읽은 지장보살님의 원력에 대한 것과 중도는 제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미래세가 다하도록 중생을 제도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님의 크신 서원은 제겐 눈물겹도록 절박하고 위대한 것이였고, 너무 좋거나 아니면 너무 싫은 극단적인 성격을 지닌 제게 중도는 그야말로 제 삶으 화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천적인 중도를 풀어내기엔 이론의 벽은 너무 높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 부족하나마 중도에 대한 내용들을 간단하게 정리해봤습니다.

우선 「백유경」에서의 중도의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두 사람의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두 여자들은 서로 질투를 해서 남편을 못살게 했습니다. 만약 남편이 왼쪽 아내에게 눈길을 돌리면 오른쪽 아내가 화를 냈고, 오른쪽 아내에게 눈길을 돌리면 왼쪽 아내가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밤에 잠을 잘 때도 좌우에 두 아내를 누이고 자신은 가운데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어느날 밤 큰비가 쏟아졌습니다. 집이 낡아서 천장 사이로 빗물이 새어 들어왔고, 그 빗물은 남편의 얼굴에 쏟아졌습니다. 그래도 남편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좌우로 꼼짝도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게 쏟아졌습니다. 좌우에 누워있던 두 아내는 비를 피해 일어나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남편은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그 사이 빗물이 지붕의 흙을 담고 내려와 남편의 얼굴 위로 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끝내 남편은 두 눈을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도망간 두 아내는 남편이 실명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어리석은 중도를 비유한 것입니다. 중도를 말할 때 흔히 ‘좌도 우도 아닌 중간상태’라는 해석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중도의 참뜻을 왜곡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의 예로든 이야기도 중도를 상태적, 위치적으로 중간이라는 개념으로만 이해한 잘못된 경우입니다. 현실에서 좌, 우의 가장 적절한 중간상태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중간이지 중도가 아닙니다. 중도는 잘못된 것을 떠나 옳은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흑백 논리가 틀리기 때문에 어중간한 회색논리를 펴는 것은 옳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증도는 곧 정도를 말한다(中者正也)’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도는 양극단을 부정하고 나아가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좋다는 식의 중간 논리가 거부되는 참다운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개념인 것입니다. 만약 중도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논리로서 전개될 때 거기에는 당연히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무정견(無定見)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논리는 강자에게만 미덕이 될 뿐 때론 악덕이 될 수도 있는 우려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라는 극단을 벗어나 괴로움의 소멸과 쾌락의 초월이라는 ‘이중부정’을 통하여 절대적인 진리의 빛을 드러내셨습니다.

즉 중도란 언어나 관념에 의한 고정화를 일체 배제하고 사물에 대한 고정적인 판단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다’‘없다’라고 하는 긍정적, 부정적 판단을 초월하여 정해진 개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와지는 공(空)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공’을 단순히 ‘비어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없다’는 소극적인 허무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개념이나 속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절대적인 존재방식을 적극적으로 시사하는 것입니다.


지난 방학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신도분이 이제 갓 백일을 넘긴 아기를 안고 절에 왔습니다. 아기가 어찌나 귀엽고 예쁘던지 전 시선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연신 “와~ 정말 예쁘다”를 외치며 아기의 주변만을 맴돌뿐이였습니다. 결국 아기를 받아 안아보고 흠족해하는 나에게 옆에 있던 다른 보살님은 “시님은... 이 아가 뭐 그리 이쁘요?”하며 나를 핀잔했습니다.

순간 저는 아기를 보는 눈이 나와 다른 그 보살님을 이상히 여겼습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예쁘기만한 그 아기가 왜 그 보살님은 예쁘지 않다고 했는지 말입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 아기는 예쁘고 못난 것을 떠나 한 아기일 뿐이였는데 결국 내 마음과 식(識)이 만들어낸 관념으로 그 아기를 예쁘다고 결정지었던 것입니다. 용수의 중론 권4 제24장 18게송에서 ‘모든 연기하는 것을 공(空)이라 하며 이는 바로 중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과(因果)에 따른 연기(緣起)는 실체가 없이 일어나는 공(空)이고, 이는 실체가 없이 일어나는 환(幻)과 같은 것이므로 정해진 개념에서 탈피된 가장 바른 견해를 지니는 중도(中道)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쁘고 못난 것뿐만 아니라 선과 악, 길고 짧음, 더럽고 깨끗한 것들도 절대적인 기준이 없이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이 만든 개념입니다. 그것에 집착하고 구속되어 결국 사물의 참다운 모습을 올바로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으로 그득한 이 가슴과 이 머리로 대중스님들 앞에서 중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중도의 개념을 되짚어봄으로써 정견을 실천하는 기회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대중스님! 계절자체만으로도 무상함을 깨달아 영혼이 정화되어 정갈해지는 때입니다. 이런 선택받은 계절. 산을 오르며 발걸음 하나하나에서 ‘우리 본래 그대로의 모습’을 발견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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