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인간과 연기법 - 정현스님

가람지기 | 2007.04.25 13:49 | 조회 3290

안녕하십니까 사교반 정현입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대중스님들은 몇 겁 동안이나 몇 번의 옷깃을 시치고 스쳤길래 운문사 이 도량에 모였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오늘 대중스님들께 인간과 연기법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세계의 인과 우주의 인과를 묻는 자입니다.

나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이 삶 이후의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등의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는 존재입니다. 연기법은 존재와 우주의 실상을 나타내는 법이어서 인과율을 묻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의 우주가 상대성의 우주이고 모든 인과적 사실이 상대적 영역의 사실이라면 이러한 우주의 진실은 무아이며 연기입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개별 자성이 없는 무아의 연기적 존재이며 그러한 무아의 존재들이 이루는 인드라망이 연기의 우주인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우주의 인과를 질문하는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성을 구축해가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존재성에 있어서 사람마다 그 존재의 영역은 천차만별입니다. 대중스님들께서는 스스로 존재영역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사람은 부지런해야지 게으르면 깡통밖에 찰게 없다.”는 부친의 말씀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든 남들 하나할 때 저는 두 세개의 일을 꼭 했습니다. 그렇게 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스스로 열심히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사를 해탈하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저는 출가를 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했던대로 무엇이든 남들 하나할 때 두 세개의 운력을 열심히 빨리빨리 했습니다.

하루는 법회를 마치고 점심공양 중에 은사스님께서 “우리 정현이는 입에 모터가 달렸나 보다. 어찌나 염불을 빨리하는지 내 옆에서 숨넘어가는 줄 알았다.”하시며 그간 참으셨던 저의 빠르고 급한 행동들에 대하여 여러 지적들을 하셨습니다. 순간 당황한 저는 은사스님의 지적을 담아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반복되는 은사스님의 지적들에 대하여 소심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담아내는 큰 그릇이 되고 싶었습니다. 스스로 큰그릇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질문하는 인과의 영역을 크게 해야 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한다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는 인과율을 보다 확장시킬수록 분쟁이나 대립보다는 조화와 관용이 우선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개개인의 싸움이 전체를 생각하면 자제하게 되고, 개인의 탐욕이 전체를 생각하면 그 탐욕을 자제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의 성품이 달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적용하는 인과율이 보다 큰 인과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연의 영역을 살펴보는 연기법의 공부는 비단 부처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을 현명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기 위해서도 절실한 공부입니다.


또한 연기법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주적 존재로 자신을 확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연기법에서의 우주적 존재란 극대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공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모든 존재적 관념들에 대한 제법무아 제행무상의 의식들을 갖추지 않고서는 우주적 존재가 되기란 불가능한 것이 연기법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적 존재로 확장하는 것이 연기법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그 우주적 존재가 닿는 곳마다 제법무아, 제행무상임을 아는 것은 연기법의 공부이며 인간이 연기법을 공부해야하는 필요성은 자신과 우주의 참된 주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대중스님! 인간의 인생이 평생 동안 존재성을 구축하는 과정이라면 쓸데없는 모래성을 쌓기보다는 자신과 우주의 참된 주인이 되는 존재성을 구축하는 수행자가 되지 않으시렵니까?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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