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대중은 나의 거울이자, 스승 - 성호스님

운문사 | 2006.07.17 13:45 | 조회 3466

결코 끝날 것 같지 않던 치문 1년이 다 가고 어느새 운문사에서 맞는 두 번째 여름이 되었습니다.

작년 이맘때와 비교해 보면 마음이 한결 여유로와지고 편안해진 것 같습니다. 정말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듯 하던 지난 1년. 새벽 예불 전 대방에서 나가야 하는 시각인 3시 22분을 맞추기 위해 그 새벽에 정랑을 향해 돌진하면서, ‘도대체 내가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눈 뜨자마자 이렇게 뛰고 있나’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었고, ‘이 수많은 세칙과 규율을 지키는 게 정말 나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하심시킬 수 있는건가. 그저 단순히 동물적으로 환경에만 적응하고 있는 건 아닌가’회의가 든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저를 지탱시켜 준 게 뭐였을까 - 생각해 보면, 첫째는 주변 환경은 다 내 마음이 반영되어 나타난 거라 나 자신이 먼저 변하지 않고는 어딜 가든 마찬가지라는 것에 대한 믿음, 그리고 둘째는 반 스님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반 스님들이 특히 수승하고 자비롭고 지혜가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하지만 각기 다른 쉰다섯 개의 성질과 모양이 만들어내는 늘 분주하고 시끄러운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으니 저 자신의 모습이 너무 잘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내가 급하면 남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우야든지 간에 내 몸 하나 편하고 싶고, 내 뜻대로 안되면 진심내고, 나태하고, 고집 센 면들을 반 스님들에게서 발견할 때마다, 그게 다 내 안에 들어있는 내 모습이어서 언제든지 밖으로 나올 틈만 노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나서서 하고, 그 바쁜 샤워시간 중에도 옆 도반의 고무신을 닦아 주거나 등을 밀어주는 스님들을 볼 때는, 저 자신이 부끄러워지면서 좀 닮아가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습니다. 왜 대중이 공부를 시켜준다고 했는지, 왜 굳이 큰 대중에서 살아봐야 한다며 은사스님이 운문사로 등을 떠미셨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첫 마음은 별로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가속도가 붙기라도 하듯 점점 더 빠르게 굴러가는 일상의 바퀴에, 그저 치이지만 않기 위해 늘 헐떡이며 살다보니 저 자신을 돌아보는 법을 점점 잊어갔고, 그럴수록 주변 사람들과 주변 상황이 자꾸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대상에게서 나쁜 점만 발견한다면 그건 다 내 수행이 부족한 탓이라는데, 그런 좋은 말은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비록 부처가 되겠다고 모인 우리들이지만 너무나 중생스러운 저 자신과 주변의 모습에 점점 지쳐갈 뿐이었습니다.


그 무렵이었습니다.

제게는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스님이 한 분 계신데요, 무슨 방광을 하거나 눈에서 불을 뿜거나 사람을 공중에 띄우거나 하는 특별한 능력은 없으시지만, 대신 늘 한결같아 흔들림이 없고, 항상 자비롭고 누구에게나 평등하시고, 옆에 있으면 따라서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그런 분입니다. 이렇게 멀리 나와 있으면 제게 그런 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더욱 절절히 느끼게 돼서, 가서 뵙게 될 때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하고 말하게 되곤 합니다. 그러면 그 분은 “내가 너한테 해 준 것이 없는데 뭣이 감사헐까〜?”하며 아이처럼 웃으시거나, 제가 막 감사한 마음이 북받쳐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간신히 참고 있으면 같이 울 것 같은 표정이 돼서 가만히 바라보곤 하십니다.

그런데 그 땐 문득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호야, 우리는 부처님께 차암〜 감사허지? 부처님이 없었으면 이 좋은 불법을 어찌 만났겄냐?”

사실 부처님은 제겐 아직 경전에만 나오는 먼 존재이기 때문에, 대신 전 그 스님에 대해 감사하는 제 마음을 떠올리며 큰 소리로 “네”하고 대답했습니다. 스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든 중생들도 부처님과 똑같이 감사해야 할 것이야. 중생이 없이 부처가 어디서 나왔겄냐?”

머리로는 그 말씀이 이해가 되지만 가슴으로 느낄 수 없었던 저는 아까보다 좀 작은 소리로 “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선 가만히 저를 바라보시다가,

“지금은 잘 몰라도, 언젠간 꼭 그 사실을 알아야만 하고, 또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스님은 이런 말씀도 자주 하십니다.

“이 세상은 TV 드라마와 마찬가지야. 작자 미상의, 혹은 우리 모두가 작가인 드라마 속에서 각자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 살인자라 해도 자기 역을 하고 있는 거라, 물론 세간법으로 보면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것이지만, 부처님의 큰 눈으로 보면 다 자비로 요렇게 거두어야 할 것이야... 너는 자기 역할을 확실히 알고 하는 것이 좋겄냐, 모르고 그냥 사는 것이 좋겄냐?”라고요.


우리는 지금 운문사를 무대로 각자 자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대중에 기여를 하는 역일 수도 있고, 대중의 힘을 빼는 역일 수도 있습니다. 성격이 거칠고 시비분별을 일삼고 이 운문사의 질서와 화합을 깨는 스님이 있다고 해도 사실 그는 자기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일텐데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스님은 훌륭한 선지식 역을 맡고 있는 걸 수도 있고, 그냥 말썽쟁이 폭탄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역할을 지정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눈이 아닐까요?


한편, 틱낫한 스님의 말씀처럼 우리 각자도 이 대중이라는 ‘숲’에서 다른 ‘나무’들 옆에 나란히, 아름답게, 기쁘게 설 수 있도록 항상 나 자신을 먼저 깊이 통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대중은 나의 훌륭한 거울이자 스승이 되고, 대중의 집약된 힘이 우리의 내면을 분명히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제가 감히 대중스님 앞에서 법문을 한다고 이 자리에 올라와 있긴 하지만, 사실 이건 모두 저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법문을 준비하면서 정말 저를 곧게 서 있을 수 있게 도와주는 반 스님들과 대중스님들이 참 소중하고 감사한 존재라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일시적 감정이나 기분이 아니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늘 누울 틈만 노리는 A스님도, 먹고 난 쓰레기를 꼭 앉은 자리에 두고 나가는 B스님도 모두 진정한 부처로, 항상 참으로 감사한 존재로 여겨질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하고자 합니다.

대중스님 여러분, 정진여일하십시오.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