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불교속에 무교의 모습(화정스님)

운문사 | 2006.04.10 13:09 | 조회 3288

대중스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사교반 화정입니다.

청매화 향이 짙은 계절입니다. 우리는 이곳 운문사에서 깊은 신심을 증장시키고 도반스님들과의 신의를 키우고 치문에서 화엄경까지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원을 오기 전이나 방학을 해서 각자의 사찰로 돌아갔을 때 우리는 또 다른 현실에 부딪칩니다. 입춘날 속옷을 태워 삼제풀이하고, 방생가서 용왕제 지내고, 그믐날 조왕기도 올리고, 산신기도 올리고, 좋은 날 받는 등 이루다 헤아릴 수가 없이 많습니다.


하루는 제가 은사스님께 이런 것들이 왜 필요하냐고 여쭈어 보았을 때 스님께서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한심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신도단련하고 소임살 수 있겠냐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궁금했습니다. 무엇이 불교이며, 무엇이 불교가 아니며 이를 배척해야 하나, 수용해야 하나, 제가 좋아하는 비빔밥 마냥 적절히 섞어 타협점을 찾아야 하나 등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대중스님들도 한번 쯤은 갈등하고 고민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불교속에 무교의 모습이 얼마나 어떻게 들어있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불교는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새로운 사사오가 종교로 배교적 큰 저항없이 한반도에 수용되었고, 민족종교로 토착화되었습니다. 불교의례중의 중단인 신중은 인도에서 유래를 갖는데 불법의 수호신으로 부처님이전 인도의 토속신이 불교에 감화되어 불법과 불법을 널리펴는 이들을 보호하겠다고 서원을 세운 이들입니다. 이 신중의 영향으로 불교는 많은 신을 받아들이는 문이 열려 하근기 중생에게 유신의 관념을 갖게해 불교를 다신교 신앙으로 생각하도록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교가 주술적, 미신적 요소로 비판을 받는 이유는 주술적 요소가 강한 무속의 부적을 수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토속신앙으로 받아들인 대표적인 것은 산신, 칠성, 독성의 삼성각입니다.

삼성각이 언제부터 사찰 내에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는 숭유억불시기인 조선시대에 사찰유지를 위한 자국책으로 민간 신앙인 삼신을 도입했다는 설과 종교의 혼합기인 고려시대에 일어난 현상이 오늘까지 계승・잔유한 것이라는 설과 마지막으로 기도의 대상인 고대민족신인 삼신이 불교전래 처음부터 사찰내에 모셔진 것이라는 세가지 견해가 있으나 학계에서는 통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성각은 재래 산신신앙이 그대로 불교에 도입된 것입니다. 처음 산신은 호법신중의 하나로 불법보호이 역할을 주었으나 조선중기 사회 불교계의 혼란으로 호법보다 무속적 성격이 더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칠성은 도교와 관계가 깊고 중국에서 형성된 것이 한국에 전래되어 산신처럼 불법부호신으로 수용되었습니다. 칠성은 서민들이 바라는 복덕구족, 제장애제거, 업장소멸, 수명장수 들의 종교적 위신력을 갖추어져 독립된 칠성각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독성각은 천태산의 나반존자를 모신 것으로 긴머리털에 흰 눈썹으로 18나한중 제일 빈두루존자라 합니다.


그런데 나반이란 명칭은 중국이나 일본의 불교사전에는 보이지 않아 한국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 민족 고유신앙과 연결시키면서 독성을 환웅이라 추정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불교는 무교를 불교적으로 받아들여 해석하고 발전시켜 왔습니다.


대중스님 여러분 혹시 공감되십니까?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스님도 계시는 것 같습니다. 무교의 성격과 불교가 가진 성격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누구의 탓이 아니라 자석이 흙속의 철가루를 모으듯이 불교와 무교가 상의상존하여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불교 내부에서 물리적으로 무교성향을 해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현재의 불교가 기복불교라는 비판적 평가 역시 이 땅에 불교가 뿌리내리기 위한 방편이었고, 역사상 불교가 겪어야 했던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땅의 어떤 종교든지 기복적, 주술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복신앙을 통해 얻은 영험을 개인의 복락차원에서 그 공독으로 진발심하는 데로 발전시킬 수 있다면 불교 궁극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대중스님, 이목소에 흐르는 세찬 물줄기처럼 정진여일하는 수행자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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