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내가 만난 부처들(운성스님)

운문사 | 2006.04.10 13:11 | 조회 4344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 시방 무량 불법승


가난한 염불이지만, 대중스님께 공양 올립니다. 장군평 논에는 지금도 개구리들의 무진설법이 한창입니다. 이런 봄날, 이젠 화엄을 보고 있는 대교반 運性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난 지금 숨조차 쉴 수가 없다 !

머리를 깎기로 했다. 대충 말고‘여실히’알아내고 말리라 !”


출가할 무렵 일기장에 썼던 말입니다. 깨진 물독에 물을 가득 채울려면, 찔금 찔금 한 바가지씩 붓다간 날 샙니다. 콸콸~ 흐르는 저 이목소 물에다가, 앞뒤 재지 말고 그냥 확~ 미련도 없이 던져버리는 게 낫죠. 저 역시 이 僧伽라는 공동체 속으로 나라는 부실한 물동이 하나를 확~ 던졌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헷갈립니다. 도대체 잘 가고 있는 건지. 어떻게 사는 게, 옳은 중노릇인걸까 ?


금당에서 살적에 일입니다. 어느 날, 상채공간에 앉아 활활~ 타오르는 장작개비 아궁이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는 저 가마솥은 어떤 심정일까 ?’

앉아있는 저 자리에서 수 십년 살아오는 동안, 투정 한 번 부려본 적 없이, 맛이 있거나 없거나, 뜨거워 죽겠거나 차가워죽겠거나, 좋아서 죽겠는 이 도반이나, 뒤통수까지도 미워 죽~겠는 저 도반이나.. 말없이, 섭씨 몇 백도를 넘나드는 저 열기를,‘있는 그대로’견뎌내고 있는 가마솥. 차 도량 내에서 그 보다 더 살아있는 경전이 어디 있을까? 그의 우직함과 용맹심이 끓여낸 국, 저녁때, 맛있게들 드셨지요?
100% 국‘만’을 위해, 오롯이 자신의 전부를 던져버린 가마솥의 용기 !


이제 나는‘무엇’에다가 내 전부를 던지겠습니까 ? 나와, 운문사와, 우리 불교계 그리고 이 시대가 다 같이 안고 있는, 이 수많은 가슴앓이들을.. 이목소 물소리보다도 더 시원하게 씻어 내릴, 그‘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


저는 아직, 돌이 채 안된 갓난 애기 적에, 엄마 품에서 떨어져 해인사의 어느 조그만한 암자로 들어 왔습니다. 최소한 3生은 ‘이 공부’ 에 한이 맺혀봐야지, 비로소 이 生에 까까머리 먹물 옷을 입을 수 있다는데~ 아무래도, 전생에 철천지 限이 맺혔던 모양입니다. 간절한 원願 따라 여기까지 오긴 왔는데, 몇 십리 걸어 탁발 해다 놓고 공부하시던 그 가난하고 추운 심심산골에서, 지금 법상에 앉은 이 모습이 되기까지, 갓난아기 업어서 회초리 때리며 키워주신 그 분은, 신도분도 많지 않은 그 작은 암자에서 정말 어찌 키워내셨는지. 이렇게 스스로 발심하여 출가하기까지, 당신은 단 한번도 '내가 너를 이렇게 잘 키웠다'든가, '너는 뭐 뭐가 되어줘야 한다'든가 그런 상相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서로의 내면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불성佛性하나만 믿어주셨을 뿐, 그래서 저는 길게 방황하지 않고 무명초를 날릴 수 있었나 봅니다. 그 분은 저희 노스님이십니다.


부처님 앞에 앉아 첫 삭발을 해 주시던 날,

“고놈 자슥, 깎아논께 천상 중 새끼네. 요번 한 生은 이 세상 까짓 거 안 태어났다 생각하고, 공부해라! 운전할運자, 성품性자. 이름값 내놔야지!”하셨습니다.

“인자 오늘밤 자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시며 너울너울 춤추시던 노스님 그 날 그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늘 저 묵묵한 금당의 가마솥 같으신 분.

살아있는 대장경. 당신의 은혜가 한량이 없습니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 보현보살이 표현하신 여래의 모습은 속고 있는 자신을

살피기에 참 좋은 나침반입니다.

하나하나의 털구멍 속에 티끌 수만큼 무한한 세계,

그 세계마다 한 분 한 분, 한량없는 如來께서 정좌하고 계시니,

불자야! 如來는 차별없이 평등하게 그 몸을 나투시니,

허공과도 같은 저 여래의 얼굴을 어디서나 만나뵐 수 있으리라.

여래는 곧‘온 세상’이기 때문이니라.


화장장엄세계가 어디에 붙어있나? 부처는 오디 있고? 반 스님들 지나가는 저 농담처럼, 오디 따로 있겠습니까? “찌지고 뽂는 이 순간이겠지! ”


<기신론起信論>에서 마명보살은, 善과 惡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眞如門과 生滅門, 이 양 극단의 구조조차도, 一心이라는 근원자리로 돌아가 보면, 잘나고 못난, 옳고 그른, 이쁘고 미운‘그 모습 그대로’ 가감 없이 비로자나의 한 몸일 뿐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때론 앉아있는 뒷모습만 봐도 눈물겨운, 존재 자체만으로 이미, 소리 없이 이 도량을 움직이고, 혼탁한 세상을 정화시키고 있는 사람들. 다름 아닌 지금 내 옆에 앉은 이 사람, 조용할 날 없는 우리반, 저 우리반 스님들, 그들입니다. 보고 싶은 것밖엔 보지 않는 나의 시력 탓이지, 스승이‘없어서 공부 못하는’시대는 아닐 겁니다. 어찌 눈빛한번, 걸음한번이라도 아무렇게 던지겠습니까 !


오늘도 채경당 홈페이지실 '인터넷 운문사'에는, 봄 향기를 찾아 달려온 세상 속의 수행자들로 북적거립니다. 때로는 시계침을 꼭 붙들어놓고 싶도록, 그들을 혼자서 맞이하기엔 너무나 바쁘고 힘겹고 외롭기도 하지만, 이 도량 내에서 제가 맡은 '가람지기' 라는 이 소임의 보이지 않는 향기를, 전 요즘 사랑하려 애쓰고 있답니다.

마치 부처님과 처음 만난 그 순간처럼, 선재의 겸허한 여행길을 따라 걷고 또 걷다보면, 조금씩 이해가 되겠지요. 세상은 우리에게 이미 떠나온 곳이지만, 동시에 언젠간 잊지 않고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기에, 오늘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질문하나에 소홀할 순 없습니다. 처음으로 '법고' 를 배우고있는 치문반 스님들, 지금은 양 어깨 자뜩 들어간 '힘' 만으로,‘뭔가를 치고 있다’그 마음에 메여 치시겠지만, 언제간 알게 되겠지요. 부드러운 손목의 자유로움을.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겐 잠시나마,‘형식’속에‘내용’을 담는, 그런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파도가 없는 것은 바다가 아닙니다. 대중스님! 매트릭스 같은 무상無常한 이 세상, 피하지 말고 던지시되,‘나’라는 이 실체를 부디 놓치지 말으시고, 여실히 여실히 살펴보세요. 어디에 자신을 던지시더라도, 그곳에 있는 부처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진실한 까까중들~ 되십시요 !


부처의 몸으로 온 법계 충만하니

널리 모든 중생 앞에 그 모습 나투셨네.

인연 따라 두루두루 감응함이 끝없으나

당신은 그 곳, 보리수나무 아래를

떠난 적이 없으셨네 !


나무 아미타불 ()

< 대방광불화엄경 > 여래출현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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