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우리 모두 폭류를 건넙시다(남오스님)

운문사 | 2006.04.10 13:39 | 조회 2696

나는 중입니다.
나는 출가수행자입니다.
언제나 예불을 마치면 해탈문을 들어서기 전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야만 겨우 지금의 제자리를 확인하는 사교반 남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손에 잡히지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행복은 몽환이 아닙니다. 체념이나 망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간절하신 설법만큼 진실하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생명의 진실인 불성을 긍정하고 믿으며 동시에 그것이 우리 생명의 현존적 실재라는 것을 믿고 생활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어떤 권능자가 주어서 얻어지는 결과물이 아닙니다.
진실을 믿고 행하는 데서 어김없이 이루어지는 법칙인 것입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하자고 생각한다면 이미 늦습니다. 먼저 마음이 있고 그 댜음에 현실 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기뻐하고 먼저 성취를 생각하고 먼저 행복을 간직해야 한다.

다음은 『잡아함경』의 한 토막입니다.

저때에 부처님께서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 깊은 밤에 한 천신이 찬란한 광명으로 숲을 비추면서 찾아와 부처님게 예배하고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하여서 暴流를 건너셨습니까?”
“나는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서 저 폭류를 건넜느니라.”
“부처님이시여, 어떻게 해서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서 폭류를 건너셨습니까.”
“무엇인가에 의지하면 침몰하게 되고 무엇인가 구하게 되면 물결에 말려든다. 그래서 여래는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서 폭류를 건넜느니라….”
‘폭류’란 글자 그대로 거칠은 물결입니다.


사람을 떠내려 보내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거친 물결입니다. 폭류를 건넜다는 것은 죽음의 강을 건넜다는 것이니 즉 번뇌를 끊었다는 말이 됩니다.
범부들은 무지와 욕망이 세차게 흐르는 거친 물결로 삽니다. 다시 말하면 폭류 속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자기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쉴 사이 없이 고통을 가져다 주는 폭류인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폭류를 건너는 거기에는 고통이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이 없는 평화의 언덕에 이른 것입니다.
불법은 죽음이 없는 평화, 고통이 없는 안녕, 변멸이 없는 영원 그 모두입니다. 부처님은 거기 이르셨고 우리도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폭류를 건넜다고 하셨습니까?

“무엇에도 의지함이 없이 아무 것도 구함이 없이 폭류를 건넜다.”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새겨 봅시다.

“의지하면 침몰하고 구하면 말려 든다.”

이 말씀을 다시 생각합시다.

실로 부처님은 너무나 명백하게 이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사실 현실적인 육체의 눈으로 알기로는 우리에게는 결핍, 불완전스러운 것이 적지 않습나다. 불완전 속에서 완전을 추구하고, 고난 속에서 안전을 바라는 것이 우리의 심정입니다. 그래서 그 바랐던 것이 이루어지면 기쁘고, 기쁨을 얻은 데 대한 감사의 심정도 우러나는 것입다.
이 말은 옳은 말입다. 다만 우리는 있는 듯하지만 없는, 견고한 듯하지만 어물어져가는, 안전한 듯하면서도 불안의 물결 속을 흘러 가고 있는 물질적, 육체적, 감각적 현실에만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 측면에서는 과연 얻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고, 채우지 못한 공허가 깔려 있는 것이 숨김없는 실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성스러운 수행이 성장하는 이유에 대하여 “욕망의 대상을 멀리하고 탐을 여의어 없애고 마침내 번뇌를 끊는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반야바라밀의 청정심으로 모인 착한 벗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여름안거정진에 왕성한 성장을 기원합니다. 마치 총림의 나무처럼……
다시 한번 나지막히 되새겨 보며 이 자리를 내려오겠습니다.
우리 모두 폭류를 건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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