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약사여래부처님 그 마음(정완스님)

운문사 | 2006.04.11 11:00 | 조회 3266

귀를 기울이면 제가 계를 받고 집에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은사스님께서 멀리 출타를 가게 되셨습니다. 사실 저희 집 어르신은 현재 서울아산병원 불교법당의 지도법사로 15년간 오롯이 살고 계십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10시면 어김없이 병원 법당으로 향해서 언제나 병든 이들과 그들을 옆에서 지켜 보아야 하는 환자 가족들을 위해 약사여래부처님께 기도를 올리신 지도 벌써 꽉 찬 15년째입니다.

어쨌든 은사스님의 장기출타 관계로 병원법당을 대신 나가게 된 그날, 새벽 일찍 연락이 왔습니다. “스님, 지금 정우가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요.”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한 사람은 언제나 병원법당에서 스님 옆에서 도와주고 계셨던 자원봉사 보살님이었습니다.

정우는 그때 3살짜리 남자아이였는데, 간이식수술을 받은지 1개월이 막 지난 아이였습니다. 서울아산병원의 경우 불교법당을 비롯한 가톨릭, 개신교의 종교봉사실이 모두 동관 6층에 있습니다. 그런데 연결된 층의 서관 건물이 소아암 환자 병동이라서 그런지 어린이 환우들이 법당에 참 많이 오고 있습니다.

물론 병마의 고통에 나이가 상관은 없겠지만, 그것을 옆에서 봐야 하는 주변인들의 입장에서 아직 걸음도 떼지 못한 어린 아기들이 벌써 몇 차례의 수술과 집에서 지낸 시간보다 병원 입원 시간이 더욱 길 정도로 장기간 투병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괴로움입니다.

처음 은사스님 따라 들어선 병원법당은, 그러한 중환자들과 마주 해야만 했던 법당은, 아직 새중이었던 제게는 지옥과 같은 고통이기도 했습니다. 정우도 그런 친구들 중 하나였습니다. 아직 3살이었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울산 고향집에서 있던 시간보다, 누나랑 같이 있던 시간들보다는 병원에서 의사선생님, 간호사 선생님들과 보낸 시간이 더욱 길어 오히려 병원법당의 부처님과 친한 아이였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간이 잘못되어서 살 수 있는 방법은 이식수술밖에 없었지만, 생체이식수술이란 것이 기본 수술비용만 1억 원에 가까운 돈이 듭니다. 웬만한 가정에서 부담하기는 참 큰 금액이지요. 더구나 법사단 활동을 하고 있었던 정우 아버님의 경우 마련하기 쉽지 않은 돈이었구요. 무엇보다도 정우와 조건이 맞는 간을 찾는 것도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다행히 전국 법사단 여러분과 전국 각지의 불자분들의 후원, 그리고 선뜻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나선 군인 아저씨와 대만의 거사님 덕분에 정우는 간이식수술을 마쳤습니다.

그 어려운 과정들을 지켜보며 역시 불보살님의 가피력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간이식수술 후에 모두가 병원법당에 떡도 같이 돌려가며 정우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울산 고향집에서는 크게 마을잔치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정우가 갔던 게 벌써 1달이 지났는데, 그 아이가 위독하다고 연락이 온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은사스님도 안 계신데,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아직 조석예불과 사시마지밖에 올릴 줄 모르는 제가 정우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만난 정우는 3살짜리 아이의 몸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불어 있었습니다. 얼굴은 웬만한 이미 눈, 코, 입을 분간할 수 없이 부었고, 배에는 이미 복수가 올라 찬 상태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살결이 이미 초콜렛색과 같은 갈색으로 다 타들어간 상태였구요. 중환자실에 들어선 저를 본 정우의 부모님은 거의 정신을 놓은 듯이 보였습니다.

순간적으로 그 자리를,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때맞춰 출타 가신 은사스님 원망밖에는 들지 않았구요. 숨 한 번 크게 쉬고, 정신 나간 듯한 정우의 부모님을 중환자실 밖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가는 길에 다시 한 번 이쪽을 돌아보지 않고 부처님 품으로 보내야 한다고, 울면서 정우만 부르고 찾으면 정우가 갈 때 힘들어서 떠날 수 없다고, 이 생에서 아팠던 기억은 모두 여기에 놓고 건강하고 튼튼한 몸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부처님 제자로 멀리 보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한참을 같은 얘기로 정우의 부모님을 설득한 후 중환자실로 같이 들어갔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조용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 그것뿐이었습니다. 조용한 염불은 어느새 2시간을 넘겼습니다. 처음엔 정신 놓고 울기만 하던 정우의 부모님도 어느새 같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정우의 침상에 의사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들이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보자마자 쓰러지려하는 정우네 보살님을 거사님과 같이 잡아주면서도 저희들은 염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우는 그렇게 아미타부처님 곁으로 떠나갔습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의 아픈 사연들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가끔 저희 집 어른스님들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결혼을 하지 않아 가족을 만들지 않은 우리중님들 양 어깨에는 각각 500명의 신도들이 있다구요. 그래서 한 스님이 적어도 1000여 명의 불자분들의 이야기는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구요.

아직 학인인 저희들이 문제 해결까지는 할 수 없겠지요. 다만 이야기만은, 힘들어서 쓰러질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만은 받아줄 수 있는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숨넘어갈 것 같은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할 때 들어주는 귀만은 갖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프면 아픈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그대로 들어줄 수 있는 귀였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더 귀를 귀울이면 아마도 관세음보살님 옆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약사여래부처님의 서원에 조금더 다가갈 수 있는 스님이 되지 않을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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