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正見 (선진스님)

운문사 | 2006.04.11 11:01 | 조회 3039

안녕하십니까? 사교반 선진입니다.

삼칠일 동안 삼천배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했던 삼천배라 무릎이 아파서도 울며 절하고, 마음이 아파서도 울며 절하고,

특히 무릎을 꿇어야 하는 대종 시간엔... 숨 막히는 그 아픔!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죠. 당당하게!

'이러다 병신이 되어도 후회하지 않겠다...'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니까,

'이 아픔은 나랑 상관없는 거다...'

결국엔

고통스러워 하는게 아니라 고통에서 한 발짝 물러나,

고통을 바라보게 되더군요

그러던 사이 대종이 끝나고 드디어 예불을 모시러 일어섰는데...

누군가가 절 잡아 당겼습니다. 무릎에 줄을 달고...

마치 팔 다리에 줄을 매달아 위에서 잡아 당기는 대로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렇게 빨딱 빨딱 일어서게 되니 자연히 절이 빨라지고 3000배를 넘어서 그 다음날엔 4000배 또 그 다음날엔 5000배.

무릎의 통증도 온데 간데 없고

더욱이 이상한 건 무릎마져 사라져 버린 그 느낌입니다. 그것도 삼칠일 내내...


그리고 출가했습니다.

그땐... 의사선생님께 물어 볼 일이라 생각했죠. 잠시 마비가 아닌가?

신심 충만한 행자시절엔... 관세음보살님의 기도 가피력인가?

그리고 지금은... 금당에서 비로자나 부처님과 함께 능엄경 목판본을 넘겨보며 "실재하는 것" 에 대해 생각합니다.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의 무한히 큰 자비의 물결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고, 비록 물질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어도 있다고 느낄 수 없었던 그 때의 무릎...

눈에는 보이는데도 느낄 수 없다면 무엇을 있다라고 말할 수 있나!

아픔을 느끼는 이 성품은 있었다 사라졌다 하지 않는 것이라면 아픔이 돌연 왜 사라진 것일까?

무릎에 관한 이 기억은 세존과 아난과의 대화를 그저 들어 그치지 않고

함께 생각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어느 조그마한 인도의 마을...

3등버스 맨 끝자리의 시트도 없는 딱딱한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먼지 풀풀 날리는 길 위를 달려 간 곳은 스라바스티!

새벽잠을 설치고 부처님께서 대비구 1250인과 함께 하시며 法을 설하셨다는 기원정사에 들어섰을때...

안개 속에 붉은 벽돌로 짠 방사같은 곳들이 있었고 또 하나,

새벽 까마귀가 있었습니다.

티벳 승려들이 예불을 모시고 난 뒤의 흩어진 쌀알들과 함께...

......그때 필릉가바차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어 절하고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발심하여 부처님을 따라 入道할 때에 여래께서 ‘세간에는 가히 즐길 만한 일이 없다’고 자주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에서 걸식할 때에 항상 마음으로 그 법문을 생각하다가 저도 모르게 독한 가시에 발을 다치니 온 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를

‘앎이 있으므로 이러한 심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다.

비록 촉각이 있어 아픔을 느끼지만 깨달음의 청정한 심체에는 아픔과 아픔을 아는 것이 없다'

다시 더 나아가 사유하기를

‘이와같이 하나의 몸에 어떻게 두 개의 느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능엄경 25원통중의 한 구절입니다

대중스님!

이와같이,

이 經을 보는 눈으로,

세상 모든 일들을 正見으로 바라볼 수 있는,

종일토록 말이 없어 그 주변이 적막해도,

생각마다 이치따라 모든 일을 보아 갈 수 있는,

그러한 그의 제자이기를 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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