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번뇌의 미혹은 수마 (다문스님)

운문사 | 2006.04.11 11:08 | 조회 3844

隨眠諸有本 此差別有六

謂貪瞋亦慢 無明見及疑

나무아미타불

‘수면은 모든 有의 근본으로 이것의 차별에는 여섯가지가 있으니 이를 테면 貪瞋(탐진)과 또한 慢(만), 無明(무명), 見(견) 그리고 疑(의) 이다.’ 아비달마 구사론에 나오는 게송입니다. 수면은 번뇌의 하나로 수면의 차별에 따라 여섯가지 수면으로 나눠지고 여섯가지 수면에서 각각으로 다시 세분화 되어 욕계·색계·무색계에 98수면이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화엄반 다문입니다. 평소 잠이 많은 저에게 출가 후 가장 어려웠던 점은 새벽예불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다보니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형태로 찾아오는 수업시간의 졸음은 제일 극복하기 어려웠습니다. 치문 첫 철 수업시간, 거의 매일 중강스님께 호명당하며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수마는 수업시간마다 늘 저와 함께 했습니다. 늘 걱정을 들으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저의 수업태도에 이제는 애처로우셨는지 하루는 “다문스님은 졸면존자다”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순간 반스님들은 웃음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졸음도 번뇌입니다. 얼마나 미혹하면 이런 번뇌에 끄달려서 헤어날 줄 모를까”안타까움 속에 중강스님의 사랑이 담긴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졸음이 번뇌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치문 첫철 아침 정통청소를 열심히 하다보면 지쳐서 수업시간에 졸릴 것이라 여겼으며, 또 자신의 몸이 허약 체질이다 보니 낯선 운문사 생활에 적응하느라 그럴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만큼 나 자신이 번뇌 망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므로 핑계 아닌 핑계로 받아들이기 싫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가을 학기가 되었습니다. 이번 철부터는 나름대로 부처님께 맹세했습니다. ‘부처님! 그동안 수마에 이끌려 자신도 잊어버리고 수업시간마다 혼미한 저를 도와주세요. 수마.혼침.도거 속에서 벗어나 성성하게 깨어있기를 발원하나이다. 이번 철부터는 졸지 않겠습니다.’ 졸음에 대한 실체와 수마의 작용이 정신을 흐리게 함을 조금씩 인식하게 되자 이제는 졸음이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깨어 있지 않는 순간을 틈타서 다가오는 것 즉, 번뇌의 일부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졸음의 마구니를 쫒아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으로 수업에 임하다 보니 수업태도도 조금씩 좋아졌습니다.

다시 시간은 흘러 사집이 되었고 구사론을 배우면서 졸음, 수면도 번뇌의 하나임을 확인하게 되자 점점 수면, 수마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나의 무시겁래의 業障이 얼마나 두터우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고 듣고자 할 때마다 마구니의 장난으로 가리워질까...

‘曠劫障道(광겁장도)에 睡魔莫大(수마막대)하니’자경문의 구절입니다. 수면은 범어로 middha, 심소의 이름이며 구사 75법의 하나이며 유식 100법의 하나로 과도한 수면은 善心을 장애한다 합니다. [잡아함경],[대비바사론]에서 ‘수면개는 수면번뇌의 다른 이름이며, 수면과 혼침은 같이 쓴다. 중생이 수면번뇌 혹은 혼침이 식심을 덮은 까닭으로 선법에 나아가지 못하고 도리어 삼계 윤회에 빠져서 벗어날 기약이 없다.’고 말합니다. 늘 깨어 있는 공부를 하는 수행자들에게 수마보다 큰 장애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무리한 신체적 활동으로 인한 체력감퇴, 신경과민으로 인한 피로의 축적, 평소 6시간의 수면보다 수면시간이 적었을 때는 몸의 균형을 잃게 되므로 이럴 때는 충분한 안정과 휴식의 수면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상에서 찾아오는 졸음에 대해서는 수마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나율 존자 이야기만 해도 수만는 수행에 큰 걸림돌이자 극복해야 할 과제라 생각됩니다.

저 역시 수마를 극복하기 위해 수업시간에 몇 가지 방편을 써 보았는데요. 첫 번째 방법으로 졸릴 때마다 사탕이나 과자를 먹었습니다. 음식물을 먹게 되면 일시적으로는 깨어 있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또 졸음이 밀려 옵니다. 그러다 보면 계속해서 먹게 되고 나중에는 방편으로 시작한 음식물이 식욕을 돋구어 습관이 되고, 뱃속으로 들어간 음식물의 양이 많을 때는 소화기관에 부담을 주어 소화작용이 원활하지 않게 되니 다시 졸음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런 결과 음식물을 섭취하는 방법은 부적절하다는 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다음 방법으로는 지압용 도구를 사용해 보았는데 비교적 효과가 좋았습니다. 졸음이 오기 전에 미리 손이나 발을 지압함으로써 신경에 자극을 주어 도움은 많이 되었으나, 이 방법도 계속하다 보면 졸음이 밀려올 때 찰나적으로 일어나는 자신의 게으름에 지압마저 귀찮게 되면서 어느 순간 마구니의 꾀임에 넘어가고 맙니다. 진정으로 성성하게 깨어 있고 싶은데 도대체 깨어 있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화두 삼아 생각한 결과, 자신의 게으름과 해태심 그리고 수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점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강원에서의 수업시간은 부처님의 經을 보고 가르침을 배우는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이제는 지압봉을 이용하면서 깨어 있으려는 굳은 결심과 의지로 도전해 보았는데, 다행히 수마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수업시간마다 수마와 긴긴 시름을 하고 있긴 하지만, 이제는 방법을 알기에 예전처럼 많이 속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수면은 적정처에서는 보약이 될 수도 있지만 부적정처에서는 독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늘 깨어 있고자 수행하는 수행인으로써 信心가득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열정으로 수업에 임하여 노력한다면 아마도 수마는 찾아 올 수 없으리라 믿습니다.

수면은 죽음과는 사촌으로 깨어나는 공부를 하는 이들은 늘 깨어 있는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맑게 해서 정신이 통일된 삼매의 경지에 도달하면 필요없는 정신활동은 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피로를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신은 더 또렷해져서 강력한 정신력을 얻고 신체도 건강하게 됩니다. 늘 깨어 있고자 하는 수행자로써 수면은 반드시 여의어야할 번뇌입니다.

대중스님! 만일 이 가운데에 저와 같은 스님이 있다면 지혜의 취모리검으로 수마를 이겨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수사에 구름이 끼매 마음 달 어둡고, 행인이 여기에 이르러 다 길을 미함이로다. 이 속에 취모리를 잡아 일으키면 구름은 저절로 형상이 걷히고, 달빛만 저절로 밝으리라.”

睡蛇雲籠心月暗 行人到此盡迷程

箇中拈起吹毛利 雲自無形月自明

나무아미타불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