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진정한 수행 (원돈스님)

운문사 | 2006.04.10 12:13 | 조회 3141

안녕하십니까? 화엄반 원돈입니다.

오늘 제가 하고자 하는 법문을 통해 다시 한번 자기를 바라보고 수행에 대해서 정립하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부끄럽지만 강원생활 중에서 겪었던 저의 경험을 들고자 합니다.

치문 첫 철부터 막연한 꿈으로 무장한 저는 늘 수행자의 이상형을 그려놓고 철칙을 세워 그 속에 자신의 언행을 끼워 맞추려고 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절대 지대방에 눕지 않고 용무 외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오로지 경공부에 매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새벽잠이 워낙 많은 저는 혼침상태로 새벽예불을 마치고 내려오다가 계단에서 넘어졌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발에 기브스를 한 채 그렇게도 경계했던 지대방 조실이 되었습니다. 바로 苦가 시작된 날이었죠.


답답하고 불편한 다리. 들썩들썩 분주한 움직임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지대방. 그러나 그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으려는 저는 틈틈이 구석에 몸을 붙이고 책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힘든 울력으로 지친 도반스님 옆에서 책을 보기에는 너무나도 염치가 없었습니다. 공부는 하고 싶고 그렇다고 한가하게 책을 보자니 도반스님한테 미안하고, 그래서 아쉬운 대로 저는 ‘논강도우미’가 되어 옆에서 난자 찾아주고 같이 해석하는 데서 만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왜 그리 길기만 한지… 하루 빨리 벗어나 활개치며 대방에서 떳떳하게 공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청풍료를 동경한 저에게 지대방은 지옥과도 같았으니깐요.


염주도 돌리고 독송도 하면서 수업을 끝까지 받고 싶었는데, 이 뼈가 잘 붙지를 않아 눈물을 머금고 장기출타를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뼈가 빨리 붙어야 될 텐데…’하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몸이 천성적인 율사다 보니 뼈에 좋다는 고기나 멸치는 입에 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홍화씨가 뼈에 좋다는 말을 들으신 노스님께서는 약탕기에 홍화씨를 달이기 시작했고, 저는 오로지 빨리 회복하겠다는 욕심으로 계속 마셔댔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사건은 또 터졌습니다. 너무 독한 홍화씨를 과다복용한 탓으로 저는 약탕기를 끌어안은 채 일어나지도 못하고 급기야는 아예 누워버렸습니다.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기브스한 채 다시 지대방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렇게 몸부림쳤던 저의 치문시절은 막바지에 이르게 되었고 그토록 기다렸던 기브스를 드디어 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웬 일입니까? 청천벽력도 유분수지, 막 기브스 푼 그 다리를 정랑 앞에서 또 다쳤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다시 기브스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숱한 장애가 계속되었습니다. 기브스 4번, 폐렴으로 인한 입원 등 장기출타가 총 3번, 일이 생길 때마다 저는 눈물과 원망으로 부처님께 묻고 또 물어야 했습니다.

‘도대체 뭔가 열심히 하려고만 하면 왜 그렇게 가혹한 장애를 주시는 것입니까? 제가 업장이 두터운 탓입니까? 기도를 열심히 안 해서 입니까? 아니면 지은 복이 없어서 입니까?' 창피한 일이지만 저는 반에서 화려한 장기출타 경력을 소유했고, 시간은 흘러 어느덧 화엄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제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지난날을 돌아보고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해답은 바로 저의 ‘편견과 이기심’이었습니다. 저와 다른 생각에 대해서는 인정하려 들지 않고, 시비를 논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또 뜻 맞는 사람만 찾았고, 강원에 있는 동안은 무엇보다 경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부에만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반일이나 반 스님들에게 소홀했던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저를 지켜보시던 불보살님은 장애를 통해 끊임없이 지대방으로 저를 밀어 넣으셨습니다. 사람을 알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그리고 그들과 가까워지라고 말입니다. 이제 그 화려한 경력을 통해서 수행이 무엇인지, 강원생활은 어떠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사소하게 치부해 버리는 일상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말입니다.


저의 손길이 필요한 모든 것이 바로 수행과 직결됩니다. 남들에게 보기 좋게 포장되어 드러나는 수행보다는 무슨 일이든 상을 버리고 진실로 이해하면서 보살행을 베푸는 조화로운 삶이 진정한 수행자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화엄이 되고 보니 더욱 너와 나로 구분되고 무관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대가와 상관없이 이해하고 베풀며 누군가를 위해서 쓰여 지고 있다면 살아서 숨쉬는 강원생활이 될 것입니다. 대중스님 가운데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지금부터 항상 자기를 살피고 돌아보며, 무엇을 얻으려 하기보다 버릴 줄 알며, 받는 것이 아니라 베풀어 주고, 붙들고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연습을 하십시요.


그나마 장애를 겪으면서도 놓지 않았던 경전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우리가 본래 부처이며 누구나 불성과 열반묘덕을 구족하고 있음을 확실히 믿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위에 석가모니께서 3천 번 이상을 거듭 환생하시면서 까지 수행자의 길을 걸으셨던 것처럼, 구도의 열정과 노력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로빈.s.샤르마의 명언으로 법문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얘야? 네가 태어날 때 너는 울음을 터뜨렸지만 사람들은 기뻐했다. 그러나 제가 죽을 때는 사람들은 울음을 터뜨리지만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대중스님!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수행자가 됩시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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