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영원한 행복(우연스님)

운문사 | 2006.04.10 11:03 | 조회 2672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학교 벤치에 앉아 먼 산을 자주 바라보곤 했습니다. 낮이면 먼 산을 바라보며 '저 산을 넘어가면 난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밤이 되면 달을 바라보며 '저 달이 있는 저 곳에 가면 난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행복을 갈망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소녀의 주위가 불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항상 어디 한 구석인가 자꾸 비어져 있는 듯한 느낌. 채워지질 않는 그 빈 자리.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소녀는 불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 이것이라면 날 행복하게 만들어 줄꺼야!” 주위의 사람들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드디어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소녀는 출가를 해 버렸답니다. '영원한 행복'을 찾아! 대중스님. 그 소녀가 누구인지는 아시겠죠?

안녕하십니까? 화엄반 우연입니다. "행복". 행복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뿌리깊은 욕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끊임없이 고통을 받아야 할까요? 제가 절에 들어와 처음 마주한 말은 '무상無常’ 모든 것은 무상하다. 조건지어진 어떤 것은 반드시 일시적이다. 우리 모두가 얻고자 하는 행복이나 본능적으로 피하고자 하는 고통 자체가 원인들과 조건들에 의해 생겨나는 경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행복과 고통은 자기자신 이외의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원인들과 조건들이 합해져 일어난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이 결국은 자신의 마음을 수련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자신이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에 의하여 통제되고 제어되며, 더 나아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부정적인 충동이나 다른 온갖 번뇌에 의하여 제한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의 적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에는 독립적인 자기 존재가 없습니다. 우리 의식이 존재할 때 분노와 증오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사랑과 자비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바탕이 본래 중립적인 까닭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주는 이 감정들은 제거될 수 있습니다.

출가 전에 저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영원하다고 생각했고, 영원하지 않은 것들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고, 모든 사물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사물들이 독립적인 존재를 지닌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출가 후 저는 철저한 내면의 수행을 통해 이 견해들은 완전히 제거될 수 있으며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저는 또 하나의 고민이 생겼습니다. 저는 이렇게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어서 행복하고 좋은데, 세속의 사람들은 이 순간에도 여전히 고통받고 있고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수행자라 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다가가야 할 것인가. 수행하여 얻을, 내가 가질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사회로 환원할 것인가.

대중스님! 이 기나긴 밤 함께 생각해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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