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연기의 진리(동찬스님)

운문사 | 2006.04.10 11:06 | 조회 3238

안녕하십니까. 치문반 동찬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간 설법하심은 인간이 어떡하면 고苦에서 해탈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고,

또한 그 해결책으로 팔정도를 설하셨습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목적 또한 열반적정에 이르기 위함이며, 또한 그것을 중생에게 회향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를 빌려 부처님께서 설하신 연기법과 용수보살의 중관사상에 대하여 이야기하려 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은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은 존재의 인식방법이며, 존재와 존재의 관계에 대한 법칙입니다.『중아함경』<상적유경>에서는 “만일 연기법를 보면 여래를 보는 것이요, 여래를 알면 연기법을 아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연기법은 전 불교 교리의 뿌리이며, 초기불교 교리의 핵심이자 인도철학사상 가운데에서 불교만의 독자적인 입장으로 불교의 사상과 실천의 전체계가 연기법에 의해서 구축되었습니다.


“연기緣起”란 산스끄리뜨어로 “쁘라띠따 사무뜨빠따(pratitya samutpāda)”이며 “연하여 결합해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잡아함경』에서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하기 때문에 저것이 생하며(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차무고피무此無故彼無) 이것이 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멸한다(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라고 연기의 이법理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아함경』에서는 연기법을 세 묶음의 갈대단에 비유합니다. 갈대단이 서로 의지해야만 설 수 있는 것처럼(!) 연기법은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며, 중도中道의 법칙이 내재되어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인연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주위의 인연 속에서 자라 이 순간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에 연이 다하면 죽게 되며, 그런 다음 또다시 다른 인연을 만나면 어떠한 형태로든 다시 태어나겠지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나를 나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다음 생의 나를 나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의 내 모습이 영원히 존재할 수 없고, 죽었다고 해서 영원히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인연에 의해서 존재했다가 없어졌다가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고정 불변하는 내가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상에서 有와 無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를 설하셨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일체제법을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로 분류하고 일체의 법은 항상함이 없고 영원한 아가 없다는 것을 “삼법인三法印”으로 설하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외도에 대하여 부처님의 바른 교법인가 아닌가를 증명할 수 있는 척도라고 합니다. 그 밖에 12연기를 통해서 고의 발생과 소멸 과정을 설하셨고, 고와 락의 중도를 사물의 연쇄적인 인과관계에 중점을 두고 설하셨습니다. 아비달마불교시대의 설일체유부에서는 일체법을 오위칠십오법으로 분류하고,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로써 유위법은 무궁하게 생멸 변화하더라도 그 법체는 삼세에 걸쳐 실제로 존재하고 공간적으로도 항상 변함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초기 대승불교시대의 용수보살의 중관학파에서는 이러한 설일체유부의 설이 제법무아의 도리에 위배된다고 비판하면서, 법체마저도 자성이 공하므로 연기한 법은 가유假有이며 가명假名이다, 공과 가유는 동일한 연기법의 측면에서 유와 무도 아닌 중도中道이며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하셨습니다. 용수보살은 초기불교의 연기법을 바탕으로 하고 반야경의 공사상을 계승하였으며, 부정의 논리인 “팔불중도”를 제시해서 공과 연기의 의미를 규명하고 중관사상을 선양하려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팔불중도八不中道”에 대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불생불멸 불상부단 불일불이 불래불거不生不滅 不常不斷 不一不異 不來不去” 생기는 것도 아니요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항상함도 아니요 끊어지는 것도 아니며, 동일한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불생불멸이란 여기에 하나의 감자가 있습니다. 이 감자는 무시이래로 전해져 왔기에 무에서 유로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며, 지금의 이 감자는 이전의 감자를 이어온 것이기에 그 이전의 감자가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불상부단이란 감자는 끊임없이 형태가 변해서 서로 같지 않고 원래 심은 감자 씨앗은 땅속에서 썩게 되니 항상 하지 않으며, 그렇지만 새로운 감자 열매를 맺으니 끊어진 것도 아닙니다. 불일불이란 단절되지는 않았지만 이전의 감자와 열매 맺은 감자는 동일한 감자가 아니며, 그렇다고 이전의 감자와 씨앗과 싹과 열매는 감자라는 공통성이 있으므로 다른 것도 아닙니다. 불래불거란 감자씨앗 안에 싹과 열매가 들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데서 온 것이 아니며, 동시에 감자는 속에서 다른 것이 되어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용수보살은 <중론中論>에서 무자성공無自性空과 중도관中道觀을 천명한 것은 ‘있다’ ‘없다’라는 극단에 집착함을 타파하기 위한 교설이었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무상을 무상無常으로 보고 무아를 무아無我로 볼 수 있는 정견正見을 강조하셨고, 용수보살의 중관학파에서는 연기의 제법은 자성이 공한 것이기에 중도임을 여실히 아는 지혜인 “반야공般若空”을 강조하셨습니다.


대중스님 여러분! 이“연기와 중관사상”은 수행해 나가는데 있어서 수많은 경계에 부딪힐 때 마다 우리 수행자의 바른 삶을 지켜주는 안전벨트와 같고, 바른 수행의 길을 제시해 주는 나침판과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끝으로 <중론>의 관인연품觀因緣品의 게송으로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로써

능히 모든 희론을 적멸시키는 길상한 연기를 설하셨고

모든 설법자 가운데에 가장 훌륭한 정각자正覺者이신

부처님에 머리 조아려 경배하옵니다.


그럼 매순간 연기와 중도의 진리를 깊이 사유하는 수행자 됩시다.

성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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