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위의가 불교(효장스님)

운문사 | 2006.04.10 12:01 | 조회 2971

안녕하세요, 사교반 효장입니다.

'승僧이 중重하면 법도 존중하고, 승이 경망하면 부처님도 경 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승려의 질이 향상되면 사회가 불법을 존중하고 승가가 경시되면 부처님의 가르침 또한 무시당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의 승려의 질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바로 승가의 위의를 가리킵니다.

오늘 저는 대중스님들과 함께 겉모양과 형식을 앞세운 가식적인 위의가 아니라 참된 승려의 자량이자 불법의 수명인 계율, 이것이 바탕이 된 일상생활 속의 위의를 이야기 하고자합니다. 바람과 구름보다 엄숙해서 안으로는 사자의 덕을 품고 밖으로는 코끼리왕의 위엄을 나타냄이 위의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위의라고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아마도 마승비구와 『사미니율의』가 생각나실 겁니다.

저는 막 사미니계를 받고 은사스님과 처음 초하루법회를 지내던 날 위의에 대한 당신의 가르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법문을 하기위해 급하게 나오시다가 두루마기 챙기시는 걸 잊으신 당신은 저에게 가져오라고 하셨고, 저는 복도 끝에 위치한 방까지 총총걸음으로 가서 얼른 옷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옷을 받으시는 당신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약간 굳어 있었고 다시 갔다오라는 말씀뿐이었습니다.

‘방문을 잠그고 왔는데 뭘 떨어뜨렸나?’ 바닥을 살피면서 최대한 빨리 갔다가 돌아왔을 때 당신은 석고상처럼 저를 뚫어지게 보고만 계시다가 냉냉한 어투로 한번 더 갔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다시. 오늘처럼 바쁜 이 시간에 아무 이유없이 세번씩이나 긴긴 복도를 오가게 하는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횡하니 돌아서 가는 저의 뒷모습에서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을 읽으셨는지 잘못된 점을 잘 생각해 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순간, 혹시 걸음걸이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고, 이번에는 조금은 조신하게 시선을 바로하고 어깨도 펴고 약간의 위엄도 갖춘 자세로 걸었습니다. 드디어 당신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말문을 여셨습니다.

“효장아!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몇 번이나 다시 걸어가게 한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스님은 지금 이 순간이 막 사미니계를 받은 새스님에게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단다. 처음엔 터벅터벅 발소리를 내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갔고 두번째는 양팔을 좌우로 흔들면서 너털너털 걸었지. 세번째는 옷깃을 팔랑팔랑 거리면서 뛰는 둥 마는 둥 하더구나. 그래도 마지막엔 멀리서 봐도 부처님의 제자다운 모습으로 걸어오더구나.

효장아! 앞의 모습은 수행자의 모습이 아니란다. 수행자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더라도 항상 바른 자세를 가지고 여법한 모습으로 합장․반배 할 수 있는 위의를 갖추어야 한단다. 그런 위의는 어느 순간 겉모양만 그럴듯하게 꾸민다고 해서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가짐이 몸가짐으로 이어질 때라야 자연스럽게 자신의 것이 된단다.”


법당에서 가사를 수하고 부처님을 마주할 때나 위의를 찾으려고 했던 저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고, 걱정 한번 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던 걸음걸이 하나에도 그토록 간절하게 수행자의 팔만세행과 삼천위의를 가르쳐 주시려 했던 은사스님께 가슴 깊이 감사 드렸습니다. 그 후로 저의 모든 행동거지는 부처님 닮아가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저도 모르게 평소에‘위의가 깨달음의 지름길이다’‘위의가 곧 불교다’라고 말씀하신 어른스님들의 위의찬탄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율문에 보면 위의를 청정하게 하기위해 속복과 법복을 구별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법복을 입은 우리의 위의는 참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실 라디오나 음악, 극장 영화관람, 먹거리 등 모든 것이 위의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레코드가게에서 음악을 고르기 위해 머리보다 큰 해드폰을 쓴채 어깨를 이리저리 흔들며 가요의 한 구절을 따라 흥얼거리는 스님, 속사정은 모르지만 법복을 입고 극장문 앞을 서성이는 스님, 음식점에 들어가 거리낌없이 주문해서 먹는 스님.

부처님 당시와는 사뭇 다른 이 시대. 우리 승풍도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건 인정하지만 법복을 입은 출가수행자라면 그 행동이 자신의 양심에 떳떳해야 할 것이고 어느 누가 보더라도 주변의 환경과 잘 어울려야 할 것입니다. 때와 장소, 상황에 따라 위의는 달라지겠지만 지금의 승가는 계율을 기본으로 한 위의를 잘 지킴으로써 사회적 존귀를 회복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중스님!

2500년 전 외도 사리불과 목련을 그 모습만으로도 교화시킬 수 있었던 마승비구의 위의를 함께 실천해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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