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수행자의 복 (도형스님)

운문사 | 2005.12.26 17:30 | 조회 2900

사교반 도형입니다.

세월이 빠른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할머니가 들려주신 옛날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 드리는 것으로 시작을 할까 합니다.

옛날에 한 부자가 살았습니다. 재산은 많고 아들 하나뿐이라 부자는 큰살림을 믿고 물려줄 며느리를 구하기 위해 공개 구혼을 하기로 했습니다.


[18세 미만, 용모단정, 학력 제한 없음, 집안 안 따짐, 간단한 시험이 있음]


사방에서 구름 같은 응시자가 몰려왔습니다. 시험 문제는 부자가 내준 작은 집에서 문밖 출입을 안 하고 한 달만 살아내면 합격입니다. 대신 남녀 하인 2명을 붙여줍니다. 여기까지는 너무나 간단한데 단서가 있습니다. 세 식구 한 달치 양식이 쌀 두 됫박이라는 겁니다. 누구를 놀리는 거냐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돌아가고 그래도 한 번 해 보겠다던 사람들도 모두 일 주일이 못돼서 고픈 배를 움켜쥐고 돌아갔습니다. 어떤 처녀는 잔꾀를 내서 두 됫박 쌀을 30봉지로 나누어 놓고 한 봉지씩 풀 같은 죽을 쑤어 먹으며 버티다가 역시 포기하고 말았답니다. 몇 달이 지나도록 지원자가 없자 마을 사람들은 아들은 장가도 못가고 늙어 죽을 거라고 쑤군거렸습니다. 그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던 이웃 마을의 한 처녀가 자기가 해보겠다고 나섰습니다.

처녀는 부자가 내어 준 집에 들어서자 먼저 쌀 두 됫박으로 한 번에 다 밥을 하라고 했습니다. 놀란 하인들이 밥을 해오자 셋이서 실컷 먹고는 여자 하인에게는 동네마다 다니면서 바느질감을 모아오라고 하고 남자 하인에게는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산에 가서 장작을 해오라고 했습니다. 바느질 솜씨가 좋아서 일감이 계속 들어오고 장작을 팔고 바느질 품삯으로 받은 쌀로 셋이서 배불리 먹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자 곳간에는 쌓이고 먹고 남은 쌀도 있었습니다. 한 달이 아니라 일 년도 살 것 같다는 하인의 보고를 받은 부자는 즉시 아들과 결혼시켰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해드린 이유는 쌀 두 됫박만큼의 복도 없는 한 행자 때문입니다. 물론 이 행자는 접니다. 처음 운문사로 출가하니 사리암에 올라 가라고 해서 여러분도 잘 아시는 사리암에 행자살이를 하러 갔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잘 참아야지 굳게 마음을 먹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리암에 가니 밥은 공양주 보살님이 하고, 반찬은 채공 보살님이, 법당에는 법당 보살님이 계시고, 힘쓰는 일은 처사님이, 기도는 사집반 부전 스님이, 사무실에는 사교반 스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럼 행자는 뭐 했냐하면 일종의 깍두기라고 할까요.

하루 종일 다람쥐처럼 여기저기 잔심부름을 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강원에 올 때 까지도 나물 한 번을 안무쳐보고 국 한 번을 안 끓여보고 해 주는 밥만 먹다 왔습니다. 강원에 오자 그동안 힘들었다고 투덜대던 제자신 얼마나 부끄러운 행자였는지 깨달았습니다.


대중에서 온 스님들은 채공, 공양주, 부전, 시자에 원주 별좌까지 살다 온 스님도 있었습니다. 독(獨)살이에서 온 스님들도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저는 행자 생활을 헛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행자 때 새 중 때 지은 복으로 평생을 산다는데 제가 지은 복은 통장으로 치면 마이너스 통장쯤 되겠지요.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복 있는 사람만 올 수 있다는 운문사에 입방을 했으니 저의 복 통장은 이미 신용불량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을 겁니다.


어른 스님들께서는 항상 복감(福減) 할라 아껴라 조심해라 하시지만 저는 감할 복조차 없으니 ‘항상 복을 짓자’ 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야 합니다.

저 부잣집에 시집간 처녀처럼 이왕에 턱없이 모자라는 양식 미련두지 말고 능력껏 열심히 벌어서 쓰자 생각하지만 여전히 저는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많아서 복 짓는데 있어서는 빚진 사람 신세입니다.

수행자가 웬 복 타령이냐 하시겠지만 저기 이제는 아득히 먼 옛날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고도 우리를 향한 염려와 안타까움과 사랑으로 평생을 맨발로 먼지 풀풀 날리는 길 위에서 살다 가신 인간 붓다에게로 가는 길은 신심과 원력 외에 복이라는 양식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양식은 저절로 생긴다지만 그렇다면 부처님 같은 분께서 아나율의 바늘에 실을 꿰어주는 조그마한 복 짓는 일을 왜 마다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 분은 말씀하셨습니다.


깨달음은 있다. 깨달음에 이른 자도 있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도 있다.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 가고 가지 않고는 너희에게 달려있다.


라고요.

그 길을 가기 위해 공부하시는 틈틈이 양식 마련도 하시기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