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육화경六和敬 (능견스님)

운문사 | 2005.12.26 17:33 | 조회 3755

안녕하십니까? 화엄반 능견입니다.

우리 승가는 화함을 제일의 의義로 삼고 있습니다. 학벌, 연령, 외모등과는 상관없이 둘 이상이 모인 집단이라면 바로 이 화합의 두 글자를 기본 토대로 하여 시작합니다. 불가에서는 화합을 파기하는 자는 오역죄에 해당하여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엄중한 과보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과에 못지않게 화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동명의 뜻이 많이 있지만 총칭해서 육화경六和敬이라고 합니다.

육화경은 행동이나 견해를 같이하여 서로를 공경하고 경애하기를 마치 부처님을 공경하듯이 화경하는 화합중으로써의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육화경이라고 하는가?

밖으로는 모두가 남에게 선행을 일깨워 줌으로 화和라 하였고, 안으로는 스스로를 겸비하여 남의 명예와 이익을 존중하는 것을 경敬이라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신화경身和敬, 즉 신화공주身和共住입니다.

수행하는 우리들은 몸으로 예배 등을 같이하여 서로를 기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좁게는 제불보살님께 예배로써 그 공경을 다하는 것이며, 넓게는 몸으로써내 주위 사람들과 함께하는 수행입니다. 아시다시피 운문인의 생활은 많이 바쁩니다. 아님,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까요?

빨래는 쌓여가고, 가장 급한 일을 처리하지도 못한 채 짜여진 당번의 일을 해내야 합니다. 어느 때는 목련나무 돌아 정랑가는 것조차 바쁘니까요. 아마도 치문반 스님들이 절실히 공감하는 부분일 것 같습니다. 이렇게 빠쁘고 어려울 때 옆 도반스님들이 덜어주는 그 손길 하나 행동하나가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 줍니다. 몸이 아프거나 소임을 살때는 더더욱이나 그렇구요 또한 그런 도반스님들의 행동들에 대해 다시금 내 생각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몸으로 화합한다는 것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구화경口和敬, 즉 구화무쟁口和無諍입니다.

수행하는 우리들은 공경하고 온화한 말로써 서로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한다면 서로 큰소리 날일도 없으며 다툴일도 물론 없겠죠.

눈도 귀도 콧구멍도 두 개인데요 만약 이 입이 두 개였다면 어떠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다른 이에게 상처되는 말을 뱉으면서도 자신은 정작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혹 누군가에게 욕된 말을 들으면 속이 부글거리면서 체온이 올라감을 느낍니다. 저도 생각보다는 말이 앞서 참으로 많은 실수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저질러 놓고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화안애어和顔愛語를 저의 문자표기명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거창한 표제와는 다르게 전생의 습기인지 여전히 제자리를 달려 제일 어려운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것도 구업을 짓는 일이지만 상처되는 말을 듣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자세가 마음닦는 사람의 본분이 아닐까합니다.


세 번째는 의화경意和敬, 즉 의화동사意和同事입니다.

마음으로 서로를 기쁘게 하며 위로하고 화경하는 생각을 같이해서 신심의 의업을 이루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뜻으로 화합하여 일을 함께 도모하는 모습입니다. 뜻이 다르면 우리가 이렇게 모여 살 인연도 짓지 않았을것입니다.

어제 우리는 금정산, 천성산 터널관통 저지를 위한 행사에 동참하였습니다. 목숨을 내놓고 당신의 결의를 단식으로서 표명하시는 그 뜻에 저희 대중스님들이 함께했습니다. 하나의 뜻이 큰 물을 이루어서 일을 성사시킨다는 것은 어찌보면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그 뜻이 모이기 어렵기 때문에 일을 성사시키기가 더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까지의 이 세가지는 신身 · 구口 · 의意 삼업으로 실생활에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단면을 가지고 화합의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적당한 외형의 규제는 내면을 만들기도 합니다. 요즘 천자문을 배우고 있는데요 여기서「형단표정」이라는 4자성어가 있습니다。 모습이 바르면 그림자 역시 바른 이치와 같다는 뜻으로 사람의 진가는 일상의 행위에서도 뚜렷이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일부분의 보여지는 모습에서 우리는 수행자의 화합과 마음가짐의 자세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삼업으로써의 화합을 강조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네 번째는 계화경戒和敬, 즉 계화동수戒和同修입니다.

수행하는 우리들은 계를 행하는 생각을 가져서 이를 어기지 말고 함께 탁마해주며 지켜가는 것을 뜻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계율에 대한 논의가 학술계에서는 다시금 조명되어져 왔었는데요, 그렇다고 계본 자체가 바뀌어진 것은 없습니다. 단지 자신들의 주장에서만 그쳤을 뿐입니다. 계는 논의되어지는 대상이 아니라 실천되어져야할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화해도 바뀌어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큰스님들께서 한결같이 첫째로 꼽는 것은 바로 계행이었습니다.

『계의 그릇이 온전해야 선정의 물이 고이고 정의 물이 맑아야 지혜의 달이 뜬다』 는 언구가 있듯이 계는 수행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청정하고 맑은 수행자의 모습 또한 계행을 지켜나가는 노력에서만이 그 수행의 참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섯번째는 견화경見和敬, 즉 견화동해見和同解입니다.

성스런 지견으로 화합을 도모하는 것이라 사전에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어지럽고 복잡할수록 정견으로 세운 견해로 화합을 도모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대중이 소를 잡으면 같이 잡아야된다」는 말씀을 어른스님들께서 종종 쓰시는 경우를 들었습니다. 수순과 화합을 강조하시는 말씀이지만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바른 정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동은 아닌 듯 싶습니다. 바른 정지견이 없이 화합을 단지 뭉치는데 그 의의를 두는 것이라면 이것은 야합에 가까운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하는 회의나 모임에서의 안건처리는 다수결의 처리로 화합을 야합으로 둔갑시켜 포장되어진채 결과에 따라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매사에 한가지 한가지를 바르게 보고, 바른 지견으로 화합을 도모하도록 서로 서로가 닦아 나아가야 하는 것 이것이 견화동해에서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섯 번째는 이화경利和敬, 즉 이화동균利和同均입니다.

수행하는 우리들은 함께 닦아서 공덕을 쌓고 의식등의 이익을 균등히 나누는 보시의 행법을 뜻합니다. 넓게는 기도의 공을 모든 이들에게 회향하는 것이며, 실생활에서의 이익은 공양물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부반장 스님이 공양물을 가져가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떼같이 달려들어서 남은건 노오란 콘테이너 박스만 덜렁 남는 모습을 다 아시죠? 그 벌떼중의 한 몫을 담당했는데요 해가 가면서 차츰 그 빈번도가 줄어들기는 하더라구요.


이상의 세 가지는 자신이 스스로 얻은 계행의 수행과 지혜에 의해서 얻은 덕행을 모든 이들에게 베풀어 화합을 도모하는 내용입니다.마음이 화합해야 뜻이 모이고, 뜻이 합하면 몸이 모이게 되며, 몸이 함께하면 견해가 같이하게 되고, 견해가 같아지면 입이 모아 다툼이 없어 모두가 이익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제시되어지는 방법이 여섯 개의 항목이지만 실제로 이것들은 하나로 귀결되어지는 목적을 위한 나열일 뿐입니다. 곧 자신을 낮추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강요하지 않아도 우린 저절로 화합하며 생활할 수 있다고 봅니다.몸따로 뜻따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육화경을 저는 내 안의 화합이 곧 대중의 화합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작은것에서부터 소홀히 하지 않으며 순간에 까지도 내 안의 나를 살피지 않고서 시비를 논한들 무엇이 얻어지는 것이 있겠습니까?

밖으로 몰아지는 가쁜 숨소리를 이제는 안으로 거두어 들이는 자세가 제 자신부터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화합은 어찌 보면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로를 탁마하며 부처님을 애경하듯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는 자세로 닦아가는 것 이것이 감히 수행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붙여봅니다.

대중 스님 정진여일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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