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여기 그리고 지금 (인욱스님)

운문사 | 2005.12.26 16:10 | 조회 2818

더 큰 세상,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삭발하고 먹물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여기 수행자의 형상을 하고 250명 대중 속에 섞여 있습니다.

좀 더 크고 넓은 세계를 꿈꾸며,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해 보겠다고 멋모르고 뛰어들었는데 더 좁고 긴 우물에 갇혀버린 올챙이가 되었습니다.

불교에 관해서라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 삶에 부처님 한 분만 믿고, 그 믿음으로만 오롯이 가면 되겠지…. 그러나 스님들이 사는 절은 세상 밖을 그대로 닮은 또 하나의 작은 사회! 새로운 삶의 체험이요, 나날이 반복되는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무엇이든 포용할 수 있을 거라 자신만만했던 초발심시의 마음은 어디로 가버리고 도반스님의 충고 한 마디에도 파르르 떠니 머리카락 달려있던 옛날보다도 더 못합니다.

오로지 부처님 가신 길만을 보리라!

작은 눈 크게 떴는데 엉뚱하게도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주파수가 맞추어지고, 시비의 그물망에 걸려듭니다. 나를 찾는 일보다 밖의 일이 더 흥미진진했던 거죠.

안으로 안으로 깊어져야 할 시선은 밖으로 밖으로 넓어지고, 자신만의 편견으로 똘똘 뭉쳐져 스스로 인정하는 것 외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에게만은 아주 관대하죠.

내가 낮잠 자는 것은 다음 계획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기 위한 피로를 녹이는 생활의 활력소! 다른 사람이 낮잠 자면 공부엔 관심없고 잠만 자는 나태한 인간! 입선 시간에 내가 큰소리로 독송하면 충만한 신심의 발로! 다른 사람이 큰 소리로 독송하면 하루종일 운력하고도 기운이 넘쳐나는 에너자이저! 그리고 내가 떠들면 진지한 토론! 남이 떠들면 쓰잘데기 없는 시끄러운 말장난!

조금 과장이 섞여 있긴 하지만 흔히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럴 때, 밖으로만 부지런히 움직이던 제 두 눈동자를 안으로 돌려 봅시다.


무엇이 나를 밖으로만 내몰게 하는 것인가?

자신만의 살림살이를 찾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내 살림 없이 그저 바깥 경계에만 끄달려 산다는 것은 전혀 출가한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자타불이自他不二.

나와 너는 둘이 아니라는데, 나는 나, 너는 너,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

끊임없이 분별하며 내 뜻과 맞지 않는 것은 여지없이 밀쳐 냅니다.

포용하는 것, 나처럼 너도 인정하는 것.

제게는 큰 산을 삼키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상채공을 살았습니다.

버얼겋게 활활 타오르는 장작개비의 열기를 저항 없이 그대로 견뎌내는 금당의 가마솥. 어떻게 하면 2-3시간씩 밀어 넣는 불쏘시개의 열꽃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며 시간이 되면 맛있는 국을 내어 온 대중스님에게 아낌없이 회향할 수 있는가?


오직 한 가지. 금당의 가마솥은 100% 국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 가지 만을 위해 온몸을 바친 것입니다. 다른 잡념은 없습니다. 금당의 가마솥은 이 진리를 이미 알고 매일매일 실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제 온몸을 바칠 한 가지는 무엇일까?

내가 앓고 있는 이 괴로움을 맑게 씻어줄 방편은 무엇인가?


지금 이 순간 축서산 무여스님의 법문 한 토막이 생각납니다.

“학인 시절 중에는 경전 공부에 미칠 정도가 되어야 한다”

지금은 지심귀명례 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자기화하는 작업에 몰두해야 합니다. 여기에 100% 나를 바치는 것입니다.

아궁이 속에 불꽃이 꺼지지 않고 붉게 활활 타오르도록 끊임없이 장작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일단 한 번 끓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아주 쉽습니다. 계속 은근하게 불길을 유지하다가 시간이 되면 푸욱 익어 잘 어우러진 국을 퍼내면 됩니다.

쉽게 되지 않더라도, 처음엔 억지로 들고 있다가, 보고 또 보면 언젠가는 보여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느 날 작은 경계에도 끄떡없는 멋진 가마솥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