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그림 그리기 (현호스님)

운문사 | 2005.12.26 16:13 | 조회 2792

쓸데없는 생각말고 부지런히 공부하라.

날마다 하루종일 누굴위해 바쁠건가.


모두들 그리기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겨울 얼음 아래로 흐르던 계곡의 물마냥 힘들고 소중했던 그 시간들을 뒤로한 채, 우린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메말랐던 나무 껍질을 뚫고 나무에 물이 오르고 새싹이 나왔습니다. 치문의 싱그런 모습은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여름날 나무는 헐벗은 것을 면하고 초록이 짙어졌습니다. 우리도 분발해서 서로에게 이해와 양보와 자비, 인연, 인과라는 등등의 말로 위로하고 아파하고 같이 느끼려고 했습니다. 부둥켜 안을 수 없는 각자의 원의 중심에서.

작열하는 태양아래 잎들이 짙어지고 우리도 그에 질세라 마음들을 나름대로의 두께만큼씩 키웠습니다. 모두들 열정적이었고 무언가에 미친듯한 고귀한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린 또다른 세계를 위해 지쳤습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땀도 식혀주고 그늘도 만들어 준 풍성한 가을, 조금 더 있으면 수확이 절정일 것입니다. 그래도 우린 치문이라는 한 색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시야가 좁았나 봅니다. 나뭇잎들이 조금씩 변했습니다. 울긋불긋 해졌습니다. 시간이 흐른 만큼이나 저마다의 얼굴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둘씩 흩어져 떨어져도 인연따라 왔다가 가는 것이라고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산천에 단청이 시작되어 파노라마칠 때, 저는 자연에만 있는 현상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각자의 모습으로 있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모습, 하나였나 했는데 각자의 얼굴,표정,모양 등등이었고 각자가 하나의 느낌으로 오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있는 산천초목이 그러했고, 오백전 나한님들의 개성적인 얼굴과 강렬한 옷색깔, 서로 다른 시선들, 이 가을 자연과 하나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운문사 대중스님네의 마음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겨울의 문턱에서 단풍은 빛이 바래지고 낙엽이 되어 뒹굽니다. 곧이어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나면 하얀 눈꽃이 피기를 고대할 것입니다. 웅크리고 조용한, 움직임이 없는 계절, 자연이 봄 선물을 준비하듯 우리도 우리 미래의 선물을 준비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자!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얘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노스님은 잘 지어진 요사채에 사시는데도 항상 아끼셨습니다. 정랑에서 사용하는 휴지도 세칸이면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손에 둘둘 감을 수 없는 양이지만 차곡차곡 접어서 사용하셨다고 합니다. 이유는 ‘시은의 중함’, ‘인과법’이라고 간곡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생만 살다가면 그 뿐이라면 왜 그렇게 하셨겠느냐고요.

어느 노스님은 염불을 지극 정성으로 하셨습니다. 90이 다 된 노구에도 어김없이 새벽 법당에 들어서서 ‘이제는 젊은 시절 째는 나오지 않아’라고 회한을 지으시면서도 구부정한 허리로 정성껏 절을 하셨습니다. 평생 시은만 입었기에 다른 생각할 틈없이 염불하셨노라고, 그것만이 당신이 단월에 대한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또 어떤 노스님은 다라니를 하루 일과로 정해놓고 하셨습니다. 그 많은 고양이들을 돌보시다 혹 쥐를 살생하면 그 쥐를 손에 꼭 안고서 법당을 향해 3배 시키시고 ‘극락왕생 발보리심, 내생에는 귀한 집 아들로 태어나 불법만나 큰스님 되십시요’라고 하셨습니다.


노스님들과 우리의 차이는 이러한 모습을 띄었습니다. 그분들은 혼자 살아도 마치 대중이랑 사시는 것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항상 시은의 중함을 생각하셨습니다. 세세생생에 돌아올 인과를 중히 여겨서 삶 속에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분들은 소임을 철저히 살았다고 했습니다. 단지 일의 개념이나 어쩔 수 없어서라고 하기 보다는 대중을 살펴서 불편하지 않게 하는 것에서 소견이 생기고 그로 인해 복을 짓고 그것이 당신들의 원을 성취하는 든든한 배경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절집에서의 일이라는 것을 일로 보지 않고 자신의 마음 밭에 심는 씨앗을 돌보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a라에 어쩜 속아서 몸 상하는 줄 모르고 불뚝 신심을 내어 따라하다가 아마 곤욕을 치른 경험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린 이 말에 대해서 어떤 이도 ‘그른 것이다’라고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일에 정성을 들인다는 것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스스로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자신의 뜻을 세워 발원하고 실천하려는 굳은 의지에서 만 가지 고통을 감내했으리라 봅니다.

몇 분의 사소한 일상의 모습을 이야기 하면서도 막상 저에게 그렇게 살라하시면 감히 고개가 저절로 흔들어집니다. 우리가 새싹이라면 그분들은 중생의 몸으로는 한 평생 회향할 날이 더 가까운 분들이라고 할까요. 자신의 속만 들끓게 했던 그 모든 갈등, 울고 웃고, 기쁘다고 슬프다고, 좋으니 나쁘니, 고우니 밉니, 잘하니 못하니 등의 시비로 자신이 쏟아야 될 정열을 어디로 간지도 모르게 헛된 곳을 방황하고 있던 것입니다.

왜, 무엇때문일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100%의 순수성인 신심과 선근으로 깨달음에 정진할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초심자로서 세운 원을 위한 실천이 혹 간헐적으로 나타나서 실행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나태함, 그것을 배제한 정말 가슴 저미도록 하고 싶은 것, 누가 뭐라해도 하고 싶은 것, 우리가 역경을 무릅쓰고 출가했듯, 한 곳으로 향하는 불같은 정열을 가슴에 품고 자신의 길을 굳건히 지속적으로 염하는 것이 있다면 혹여 우리가 아파하는 것들에 대해서 담담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법당에서 합장을 한 단정한 손끝에 머문 시선, 질서 정연하게 심어놓은 화단의 꽃에서, 반듯하게 차려진 찬상에서, 불보살님의 천의를 보는듯한 북대암쪽 산세에서, 대중스님의 의젓한 걸음걸이에서조차도 저의 부족함을 채찍질해 주고 있습니다.

무언가에 심취해 있는 얼굴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습니다.


어제에 바탕한 오늘,

내일은 오늘 위에 그려지는 그림입니다.

늦가을! 만물이 풍성한 결실의 계절, 대지는 고요해지고자 할 즈음, 오백나한님 화현한 모습으로 저의 조어장부이신 대중스님네께 시은을 저버리지 않을 대원을 세우시고 정진여일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