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사람 (성능스님)

운문사 | 2005.12.26 16:21 | 조회 2710

운문사에 첫눈이 내리는날, 차례법문을 하게 된 사교반 성능입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실 적에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천상과 천하에 오직 나홀로 존귀하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열반에 드실 적에는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내가 가르친 진리를 등불로 삼아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리라” 라는 유훈遺訓을 남기셨습니다.

최초와 최후의 말씀에 등장하는 ‘나’ 혹은 ‘자신’이라는 말.

여러분은 그러한 자신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코살라국의 왕 파사익에게 말리라는 왕비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파사익왕은 말리왕비와 함께 성의 높은 누각에 올랐습니다. 발 아래로 코살라의 산야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실로 웅대한 조망에 취해있던 왕이 문득 왕비에게 물었습니다.

“말리여, 이 넓은 세상에서 그대는 누가 그대보다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가?”

“폐하, 저는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폐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리여,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스님들께서도 파사익왕과 말리왕비의 생각에 동의하십니까?

인간이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건 감출 수 없는 본성일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켜서, 남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아힘사, 즉 비폭력을 말씀하셨습니다만, 그것은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이도 자신을 소중히 여길 것이기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일 겁니다.

자, 여러분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러면 어떠한 방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요.


우리의 몸은 편안한 것을 추구합니다. 입은 부드럽고 맛있는 음식을, 마음은 즐겁고 행복한 것을 추구합니다. 이것을 충족시키려는 행위가 소위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이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추구한다는 것, 자기가 원하는 걸 갖고자 하는 마음이죠. 이것이 바로 탐심貪心입니다. 살다보면, 자기의 동기와 부합하지 않는 일들도 하게 되는데, 그것을 밀쳐내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죠. 그것이 바로 진심嗔心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고苦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러한 탐심貪心과 진심嗔心으로 인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는 자신에 대해서는 눈이 멀게 되고, 도리어 탐貪과 진瞋을 사랑하는 것을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죠. 그것이 바로 치심癡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탐진치로 이루어진 것이 자신인 것으로 착각하다 보니, 연기라는 관계 속에서 더불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의미가 변질됩니다. 그것이 바로 무명無明이죠.


기신론에서는 무명을 '부달일법계不達一法界'라 해서 자기와 상대를 나누는 것이라 말합니다. 일법계 속에 포함된 자신을 떼어 생각하는 거죠. 이렇게 나와 남을 나누고 그 속에서 나를 충족시키기 위해 본의이든 본의가 아니든 다른 이를 해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스러움을 아는 자는 다른 이를 해쳐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생활 속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직접적인 살생, 폭력이 아니더라도, 말을 무기로 삼아 다른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렇게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은 자신에게 쏟아야 할 관심과 사랑이 밖으로 치달리기 때문입니다. 남의 잘못, 남의 행위, 남에 대한 관심으로 정신을 잃다보니, 자기 자신은 어느새 사라지고, 주체성마저도 상실해버리게 되죠.


다른 이에게 치닫는 관심과 사랑을 내부로 쏟아봅시다.

어떻게 하면 밖으로 향하는 내 마음을 안으로 돌이킬 수 있을까.

중용에 보면 임금이 한 신하를 신임하지 않자 그 신하가 이유를 묻습니다.

임금은 ‘너의 벗도 너를 믿지 않는데, 내가 어찌 자네를 믿겠는가’ 라고 하죠.

다시 친구에게 묻습니다.

‘벗이여, 왜 나를 믿지 않는가?’

‘친구여, 자네 부모 역시 자네를 믿지 않는데 내가 어찌 자네를 믿겠는가?’

다시 부모님께 묻습니다.

‘부모님, 왜 저를 믿지 않습니까?’

‘아들아, 너는 너 자신에게 소홀하니, 자신도 못 지키는 아들을 어찌 믿겠는가?’


자기를 올바르게 가지려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자기의 불성佛性, 즉 참된 자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거죠.

자기의 불성에 관심을 갖고 간절히 믿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아울러 다른 이도 사랑하게 되지요.

어디에나 부처님이 계시는 셈이니까요.

이러한 불성, 나의 자신, 다른 이의 자신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여 진심으로 흠모해 봅시다.

이미 내 속의 부처를 앙모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신身, 구口, 의意 삼업의 행위는 온통 몸으로는 불행佛行이요, 입으로는 불어佛語요, 마음은 불심佛心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겁니다.


파사익왕이 부처님께 여쭈어봅니다.

“세존이시여,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대왕이여, 신구의 삼업으로 선업을 행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자아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부처님의 최초의 말씀대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요, 최후의 말씀대로 자등명 법등명 하는 일이 가슴깊이 와 닿으리라 봅니다.

자신을 의지처로 삼을 만한 힘이 생기고, 어떠한 일에도 두려움이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치문 수업시간에 중강스님께서 출가목적에 대해 물어보신 적이 있는데, 저는

“금생에 성불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을 다 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제 불성, 진정한 자기 자신에는 소홀히 하고, 머리 속이나 채워 선근이나 심어보겠다는 알량한 생각이었던 거죠.

지금 또 한 번 물어보신다면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예불 때마다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신 분의 존안을 뵙습니다.

그야말로 평화롭습니다. 마음도 놓이고, 그분의 모습 닮기를 갈앙하게 됩니다.

이 법문은 제 안에서 자기 노릇을 하고 있는 제자신에게 한 법문입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날마다 좋은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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