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석가모니, 그 상처 입은 영혼이여!(동우스님)

운문사 | 2005.12.26 13:19 | 조회 2957

그 때 나는 머리카락이 숯과 같이 검고 젊은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울부짖고 말리는 부모를 뿌리치고 나는 내 머리털과 수염을 삭발하고 노란색의 두루마리를 걸치고 출가했다. 나는 이제 비할 바 없고 필적할 수 없는 평화로 가는 길을 찾는 구도자가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입니다.

일전에 오셨던 법정스님께서는 어느 책에선가 '자살에 비견할만한 자기부정을 통해 선택한 길'이라는 말로 출가심정을 밝혔습니다만, 모든 스님들 또한 출가 당시의 비장감이 없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흔히들 初心! 그것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수행에 큰 진전이 있으리라 말합니다. 그러나 갈수록 '간격'이 생깁니다. 출가 초심을 상기하는 것이 오히려 '자학'이라는 번뇌만을 낳기도 합니다. 문득 '이렇게 속절없이 세월만 보내서 되겠나. 어디 가서 목숨 걸어 놓고 한바탕 애써 결판내야하는 거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일기도 하죠. 사실 별 쓸모 없는 지극히 관념적인 열정일 뿐이다, 생각하면서도 가끔씩 휘둘리니… 아직 한참 멀었나 봅니다. 강원에서 경을 보는 학인으로써 가장 크게 느끼는 '간격'이라면 무엇보다 경전의 말씀과 실재 수행현실일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대학 수학교과서에 실려있는 달라이 라마의 말입니다.

"여러분 나의 언어, 단어들에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 의미를 도출한 심오한 경험에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

결국, 낙처(落處)는 심오한 경험입니다. 경을 보게 되면서 더욱 간절해집니다만, 우리가 최종 궁극으로 주목해야 할 목표는 말도, 문자도, 환상도 아닌 실질적인 경험과 증득입니다. 누구나 고개 끄덕일 것이고, 또 한편 현실과의 간격으로 인해 고뇌할 것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오늘 한 번 새삼스럽게 환기시켜 봅니다.

과연 우리는, 나는 부처님의 팔만 사천 법문을 낳게 한 그 심오한 경험, 즉 깨달음에 대해 소망하는 바가 얼마나 간절한가. 과연 진심으로 깨닫고 싶은가. 이 고통의 사바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즉 깨어나겠다는 결심은 충만한가. 그것이 내 전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 되고 있으며, 모든 것은 이 목적의 부수적인 것이고 그리하여 하찮은 욕망쯤 미련 없이 내던져 버릴 수 있는가. 간격들을 좁히기 위해 나는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

가끔 의심스럽습니다. 과연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은 커녕 스스로 어떤 존재로의 향상과 전환을 도모하는지, 자각하고 있기는 하는 건지.

내가 만약 부처님의 이 대단한 말씀들 - 이를테면 희노애락이 들끓는 견고해 보이기만 하는 이 세계가 몽땅 幻일 뿐이다. 또는 자아실현이니 개성 시대니 하며 나다 남이다를 더욱 철저히 분리시켜내는 현대사회에서 '나'라고 할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으며 이 우주법계, 시방세계 전체가 일합상, 이 사문의 한 몸뚱이일 뿐이다, 라는 이런 폭탄선언과 같은 말씀들을 골수에 사무치도록 믿고, 진심으로 진리로서 체현하고자 마음먹은 작정한 사람이라면 과연 그 말씀 듣기 전과 똑같을 수 있겠나, 아직 나는 무엇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해보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보들레르라는 시인은 '상처받은 영혼만이 꿈꿀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장 큰 상처 입은 영혼이며 그리하여 가장 큰 꿈을 꾼, 결국 성취한 그런 분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중지부경」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구들이여, 그처럼 풍족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지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어리석음에 덮인 세상사람들은 늙음을 피할 수 없고, 언젠가 늙어가야 한다.

나도 늙고 늙음을 피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늙는 것까지 보아야 하고… 나도 죽어야 하는데 다른 이들이 죽는 것까지 보아야 하니 내 마음은 무겁고 괴로워 병이 들 지경이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자 나는 내 젊음에 대한 모든 자부심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또 「수행보기경」에서 출가 당시 마부 차익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세상이 즐겁지 아니하니, 차익아 머무적 머무적 하지 말아라.

나의 본래 서원을 이루게 되면 너의 삼세 고통을 없애 주리라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세계에 널려있는 생사의 , 삶의 고통들이 부처님에게는 상처가 되었고 그에 대한 해탈의 꿈을 꾸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척이나 섬세한 분이셨고, 또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고 계셨던 분이라 여겨집니다. 자신만의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선정지도자 자리도 거들떠보지 않았으며, 또 타락했다는 만인의 손가락질을 무릅쓰고 고행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겠죠.

어떤 꿈을, 어떤 문제의 해결을 주목하고 계십니까. 목표의 원대함보다도 그럴듯한 명분보다도 진정 자신의 수행방향이 어디인가에 대한 환기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됩니다. 목적은 신중하되 분명해야 하고, 실행은 과감해야 합니다. 사집을 거치며 귀에 닳도록 들은 말이 있죠. '깨닫고 싶어하는 것이 가장 큰 병통이다. 뭔가 구하고자 하면 즉시 어긋난다.' 눈물나도록 참 좋은 말씀이면서, 또 한편 '그러면 도대체 어쩌란 말이나?' 가끔 심술이 나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불교의 매력이자 어려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느 쪽을 말하더라도 그것은 단면, 일면일 뿐입니다. 맞는 쪽으로 얘기하면 다 맞고, 틀리는 쪽으로 얘기하면 몽땅 다 틀립니다. 문제는 자신이 현재 어느 코너에 몰려 있느냐는 겁니다. 어느 구석에 틀어 앉아 한 발짝 전진하지 못하고 있느냐죠. 그것이 과도한 의도냐 아니면 안일한 방기냐. 그중 오늘 환기되는 것은 물론 목적 잃은 안일한 방기 쪽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두 상호가 있습니다. 지혜와 복덕구족의 원만상호와 또 낱낱의 갈빗대가 고스란히 드러난 대면하기조차 조심스러운 고행상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세계의 모든 파란과 아픔들을 어루만져 섭수하신 원만상호의 부처님도 더없이 좋지만, 자신의 출가서원을 저버리지 않고 그 극한까지 애써보는 선배 수행자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이 지금은 더 요긴한 약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다 못해 무당도 최극처로서 서슬 퍼런 작두칼날 위에 올라서는 날을 기약한다고 합니다. '면도날처럼 기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중'이라는 표현을 봤는데, 다른 사람을 베는 것이 아닌 자신 스스로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단련시켜서 배어 나오는 그 빛나는 윤기, 보고싶습니다.

사실 이제까지 늘어놓은 말이 향해야 할 곳은 바로 저 자신의 심장 한복판입니다. 부끄러운 말들을 용감무쌍하게 대중 앞에 내놓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출가직후 너무 좋아서 여러 번 곱씹던 게송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殘枯木依寒林 꺾이어 버려진 마른 나무가 싸늘한 숲 의지해 있나니

幾度逢春不變心 마음 변치 않고 맞이한 봄이 몇 번이더냐

樵客遇之猶不顧 나무꾼도 지나면서 거들떠보지 않거늘

영人那得苦進尋 대목인들 어찌 애써 찾아 챙기겠는가.


마조 문하 대매법상 스님의 게송입니다.

최잔고목,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는 부러진 고목이 뜻 변치않고 숲을 의지해 저 스스로 존재하듯 뭔가 분주해지고, 형식만 번드르하며 왜인지 어딘지 모르고 갈피없이 내달리는 작금의 현실에서 이 최잔고목과 같은 묵직하게 자신의 본분 잊지 않는 든든한 수행정신이 그립습니다.

부디 저를 포함한 모든 대중 스님들, 이 자리에 함께 모인 뜻 저버리지 않고 모두 부처님 되어 만나 뵙기를 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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