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멈추지 않을 흐름으로 (성지스님)

운문사 | 2005.12.26 13:21 | 조회 3192

눈앞의 일상사에 허덕이느라 하늘에서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놓쳐버리고 있다면 잠시 바쁜 마음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우주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도량에 봄빛이 무르익어 갑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풍경이 눈길을 빼앗는 요즈음 희망이 뿌리를 내리는 계절에 이 자리에 설 수 있음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기나긴 겨울을 인내하며 꽃이 피고 잎이 돋기까지 우리가 모르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을 테지만 푸르른 새싹으로 돋아나 구김살 없는 화사한 꽃으로 피어난 봄의 충만함이 우리들이 꽃피워내야 할 본분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무엇이 수행자의 삶인가? 이것이 과연 수행자의 삶인가?

무기력한 일상의 평온한 흐름 속에서 가져보던 내면의 몸부림은 저로 하여금 한 점 희망을 품고 자꾸만 발 닿아 보지 않은 미지의 곳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했습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학인이고 보니 처처에서 만나던 많은 선연들이 감사함을 선물해 주셨고 가끔 만나던 냉정과 불친절은 겸손과 친절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인연과 신선한 경험들에 가슴 뿌듯해 하며 기행을 즐길 무렵. 어쩌다 스쳐 지나는 인연으로 잠시 머물던 산사에서 우리 앞에 후미진 그늘로 존재하는 뒷방 객스님을 만났습니다.

변변찮은 토굴하나 없이 병고 때문에 결제도 들이지 못하고 약단지를 짊어지고 안식처를 찾아 헤매던 백짓장처럼 허연 얼굴의 비구니 스님이었습니다. 제대로 어른스님 시봉을 못했기 때문에 더더구나 이렇게 병든 몸으로는 본사로 돌아갈 수 없다는 자조는 애처로움과 함께 서글픔으로 밀려들었습니다. 아직 잔설이 남아있는 암자 앞 야산을 포행 삼아 오르는 뒷모습에 진한 고독이 배어나옴을 느끼며, 수행자라는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감은 뜻을 세워 출가한 수행자가 일평생 오롯이 외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였습니다. 아직 혈기 왕성한 젊음이 있어서 혹은 수용할 복이 남아 있어서 외쳐보는 이상이 저렇게 병고와 노쇠와 가난이 찾아왔을 때도 과연 변질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할 수 있을까. 몇 일을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상념에 젖어있던 어느 날 기도시간 우연히 고개 들어 바라본 부처님. 모든 중생의 아픔을 감싸안을 듯 두 팔을 벌리고 자애로운 눈빛으로 굽어보시는 부처님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속에 뜨거운 무엇인가가 잔잔히 퍼져왔습니다.


佛身充滿於法界 부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시어

普現一切衆生前 모든 중생 앞에 나타나 계시도다

隨緣赴感未不周 인연에 따라 감응하지 않는 것이 없으시나

而恒處此菩提座 항상 본래의 자리에 계시도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이 인토이고 예토인데 업에 코뚜레를 꿰어 삼계육도를 헤매인지 몇 겁을 지냈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을 터인데 이제 그 두터운 속박을 벗어날 유일한 기회를 만나 저 정도 감내할 각오도 없이 어찌 먹빛옷을 걸치고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호의호식하며 적당한 토굴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편안한 생활을 영위한들 업력에서 해탈하지 못하고서 영원한 안식처를 찾았다고 할 수 있을까? 위험하다고 떠나지 않으면 뱃사공과 배의 존재가치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부처님도 생노병사의 고통을 바라보다 이 언덕을 넘어 저 언덕으로 건너가셨는데 설사 가는 동중 풍랑이 거세다고 수행의 배를 버리고 이 고통의 언덕에 안주하는 일이야말로 애처로운 일임을 잠시 망각했었음을 알겠습니다.

내 노정의 한 모퉁이에서 만난 그분이 찾아다니던 안식처는 형상의 토굴이 아니라 영원히 안주할 수 있는 진리의 토굴이었을 거라고 믿고자 합니다. 그리고 실로 그것이 아니었다하더라도 부처님께서 자비의 화신으로 그분 앞에 나투셔서 몸과 마음의 평온을 되찾게 되기를 염원합니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순간에 이유도 모른 채 하나의 생명으로 이 세상에 내던져진 그 근원적이고 결정적인 생과 죽음의 부자유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모든 속박은 저절로 해결되리라 믿습니다.

수행의 길목에서 힘들고 고달픈 날도 있겠지만 진정한 자유의 의미와 가치를 알았을 때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깝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내가 매함에 어디에도 안식은 없을 것이며 내가 환히 밝음에 어디에도 속박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집에 있는 사람은 자재하지 못한데서 즐거움을 찾고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는 사람은 자재한데서 즐거움을 찾는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납자들은 목에 율무염주 하나를 걸고 다녔는데 율무는 육칠십 년이 지나도 싹이 트므로 운수납자가 산길을 가다가 지쳐서 죽으면 시체는 썩고 그곳에 목에 걸고 있던 염주가 싹이 터 율무나무로 자라기 때문에 옛스님들은 산길을 가다가 율무가 무성하게 자라있는 것을 보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반야심경을 읽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구름같이 바람같이 살다간 운수납자의 숭고한 삶을 어찌 범부가 비참하다느니 애처롭다느니 하며 값싼 동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2500년 전 은혜와 사랑을 버리고 출가 수도하여 해탈을 이룬 밋다가리 비구니 스님의 게송으로 오늘 법문을 갈무리할까 합니다.


신앙에 의하여 출가하여 집을 나와서 집 없는 상태에 들어서도

나는, 이익과 존경을 얻을 것을 열망하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나는, 최고의 목적을 놓치고, 낮은 목적에 친숙해졌습니다.

나는, 모든 번뇌에 지배되어 '수행자인 경지'라는 목적에 눈뜨지 못했었습니다.

그런 내가, 조그만 암자방에 앉아 있을 때, 마음에 공포가 생겼습니다.

'나는 삿된 길에 들었구나. 나는 망집에 지배되어 왔구나!'하는

나의 생명은 짧다. 늙음과 병이 목숨을 해치고 간다.

이 몸이 부서지기 전에, 나에게는 게으를 시간이 없다.

개체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의 구성요소가 생겼다가 멸하여 가는 모양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나는 마음이 해탈되어, 일어섰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의 실행은, 완성하였습니다.



- 「2500년 전의 비구·비구니의 시」한갑진 역-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또 앞으로도 거치겠지만 제게는 변치 않는 서원이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진흙에 빠지고 잘못된 길을 간다하더라도 궁극에는 내 자성의 근원인 부처님 당신께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대중스님! 도란 무엇이며 깨침이란 또 무엇일까요?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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