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믿 음 (석묵스님)

운문사 | 2005.12.26 13:26 | 조회 2847

산과 들판에 녹음이 짙어 가는 만큼 날씨 또한 만만찮게 더워지고 있습니다. 더운 날씨에 공부하랴, 일하랴, 그 어느 때보다 바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듯 바쁜 일과 속에서도 입산 출가해서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 봅니다.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고, 생·노·병·사의 고통을 해결해 보고자 발심하여 출가했지만 막연하게만 동경해 오던 절 집안의 생활은 생각했던 바와 많이 달랐습니다.

때로는 회의도 오고 이곳도 과연 별수 없는 사람 사는 곳이구나, 과연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럴 때 저에게 커다란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한국불교를 빛낸 근세 비구니 큰스님들이십니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되어 유통되는 과정에서 비구니와 여성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을 은거시켰던 모례의 누이 사씨는 한국불교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고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의 왕비는 사씨의 유풍을 사모하여 묘법 비구니가 되었으며, 백제의 법명 비구니를 비롯한 많은 비구니 스님들이 일본으로까지 건너가 불교를 전했다 합니다.


이렇듯 덕 높은 비구니 스님들이 적지 않았으나 애석하게도 그러한 비구니 스님들의 세세한 수행의 모습이나 도달된 깨달음의 경지를 전하는 자료는 거의 없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를 살다가신 비구니 큰스님들의 수행과 깨달음, 교육과 교화의 모습을 담은 책을 접하면서 근·현대사를 가름하며 당대를 풍미했던 고승 비구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행 정진력으로 한국 불교를 빛냈음을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본래 마음자리를 밝히는 수행자로서 부처님 법을 전하는 전법자로서 절을 일구고 지키는 가람 수호자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당당한 부처님 제자로서 정진하시다 가신 덕 높고 훌륭하신 비구니 큰스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제가 큰 감동을 받은 한 분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묘리당 법희 노스님이십니다.

스님은 철저한 계행과 수행을 통해 근세 이후 한국 불교사상 최초로 비구니 선매을 일으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스님은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네 살 되던 해 동학사 미타암에 맡겨지게 됩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 어머니의 죽음과 이별을 맞으면서 가슴 속 깊이 고뇌하게 됩니다. 동학사에서 사집과 사교를 마치고, 경북 청암사에서 『법화경』을 보던 중 간경으로는 정진의 한계를 느껴 사교입선의 뜻을 세우고 당시 제방에 법력을 크게 떨치던 당대의 거목 만공선사를 찾아가 사자의 인연을 맺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불철주야로 '참다운 나'인 인간의 본래면목을 참구하던 중 마마병에 걸려 눈앞에 닥친 죽음에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정진하던 중 그 법연에 힘입어 심안이 홀연히 열리니, 만공스님께서 '장하다'하시며 묘리당이라는 당호와 전법게를 내리셨습니다.


만상이 적멸함은 석가의 얼굴이요

적멸이 멸하여 다함은 진귀조사의 면목이로다

부처님이 몸을 나투신지 2,3천년에

묘리의 참다운 빛이 영원토록 어두워지지 않는구나.


마침내 장부 일대사를 마친 스님께서는 전국의 수행처를 도시며 만행과 안거수선을 통한 철저한 자기수행과 후학지도에 한치의 소홀함도 보이지 않으셨으며, 미수의 노구에 이르기까지 마음과 육신을 쉬는 바 없이 유유자적하게 납자의 본분을 다하시던 스님은 대중에게 가고 오는 바가 둘이 아님을 알리더니 홀연히 열반에 드셨습니다. 노스님의 고매한 인격과 견고한 덕화는 한국 불교 비구니계의 표징으로 남아 후학들에게 더없는 전법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중스님.

깨달음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매일 밥먹고, 잠자고, 옷입고, 세수하고, 예불하고, 간경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간단없이 구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믿음은 도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라 선근을 자라게 한다"고 했고, 『유식』에서 논하기를 "믿음은 물을 맑히는 구슬이 능히 흐린 물을 맑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고 세상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증득하려면,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의 정진과, 나도 할 수 있다는 간절함과 자신감인 것 같습니다.

대중스님.

자타일시 성불도를 발원하오며, 더운 날씨이지만 늘 정진여일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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