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법다운 공양 (무위스님)

운문사 | 2005.12.26 13:29 | 조회 3056

대중스님!

사시 법공양은 잘 하셨습니까?

정좌하셨으니, 제가 수보리가 되어 가르침을 청합니다.


"대중스님이시여, 법다운 공양이 무엇입니까?"


죽비 3성에 불생가비라, 성도 마갈타…

나는 왜 태어났으며, 무엇을 얻고자 하며, 어떻게 수행할 것이며,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

부처님의 삶의 궤적을 따라 저를 돌아보고, 여래의 응량기를 폅니다.


다시 죽비 1성에 청수淸水, 밥, 국 순으로 행반합니다.

청수를 기다리며 '질서'에 대해 생각합니다.

행자시절, 저를 가장 숨막히게 했던 것이 '상하질서'였습니다.

군대를 지원한 것도 아닌데, 군대법이 절집에서 나왔다는 말을 귀에 박히게 듣고, 할 수 있는 말이란 오직 네마디!

" 예, 아니오, 잘못했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상하간에는 무조건 '잘못했습니다'가 최선책으로 보였고, 세납은 절집 상하에 냉혹하게 무시되었습니다.

행자가 아팠다고 매섭게 경책하던 스님들!

말까지 더듬거리며 '내일은 가야지. 내일은 가야지'를 되풀이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오랜만에 사시예불을 드리고 나오는데 노전스님이 부릅니다.

"행자님! 자기 자리에 앉는 것이 대중의 이익이예요."

법당이 한가해서 늘 앉던 구석자리를 피해 앉았는데 한 스님이 늦게 들어와 제 앞에 앉는 바람에 스님보다 상석에 앉게된 상황이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대중의 이익이란 말인가.

부처님은 그렇게 상하를 따지셨을까.

온 도량이 상과 하뿐인 절집.

그래도 계속 남아있어야 하는가?

그간에 쌓인 불합리, 모순, 부당함이 쏟아져 절집은 환멸 그 자체였습니다. 더 이상 판단하기를 포기해버리고, 그저 일만 하면서 몇 개월을 보내던 어느 날, 저는 상하질서속에 '대중의 이익'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남으로 하여금 한 생각 일으키게 하는 내 행동이 얼마나 큰 악업인가."

"나로 하여금 한 생각 덜어주는 너의 행동이 또한 얼마나 큰 선업인가."

질서 속에서 각자의 위치에 걸맞게 행동하고 말할 때, '일파자동만파수'인 분별이 그치니 이것이 '대중의 이익'이었습니다.


이제 반찬입니다.

김치 - 변함없이 있기를 바라는 그 자리에 붓다, 진리, 행복, 서장, 출가동기,

은사스님, 인도를 담습니다.

밑반찬 - 자신을 태워 주위를 밝히는 초처럼 소중한 이 자리에 기도, 간경, 예불,

선지식, 도반, 운력 등을 담아봅니다.

새반찬 - 苦의 대지를 뚥고 나와 삶이 苦임을 잊을 만하게 하는 사리암소임, 차례법문,

경책운력, 회성당의 초발심자경이, 월드컵 4상에 오른 한국축구 등등

우리의 일상사인 희노애락을 새반찬 그릇에 담습니다.


대중스님!

저는 공양을 하면서 반찬 그릇에 우리 삶을 담아보는 일을 줄곧 해왔는데, 이제는 삶을 이렇게 정의하려 합니다.

"삶은 조촐한 찬상이다."

어느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의 차이일 뿐, 삶은 이 세 가지 반찬 그 이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 날에도 세 그릇안에 삶을 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조촐한 찬상을 낼 것입니다. 운문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장스님을 비롯한 운문 대중은 찬상 위의 상관관계를 토대로 각자의 그릇에 맞게 역할을 하는 셈이지요. 저 산과 들, 바람과 바위, 그곳에 깃든 우리와 철철이 피는 꽃들도 조촐한 찬상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연이 차린 찬상에는 새반찬으로 오르면서 내 인생이라는 찬상에 좋은 반찬을 내기 위해 순간순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오관게입니다.

우리의 삶은 언뜻보면 '나'로부터 시작되나, 사실은 '나 아닌 나'의 것이지요.

이제 오관게를 송하여 음식에 담긴 수많은 사람의 노고와 시주의 은덕과 음식이 되는 생명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음식의 좋고 나쁨, 많고 적음을 헤아리느라 음식의 은혜를 망각했음을 반성하며 다만 도업을 이루기 위해 공양할 뿐임을 거듭 상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공양은 도업을 이룰 때 의미가 있다는데…

이 도업을 이루고자 하는 뜻은 어디에 있을까요?

대중스님 !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을 이 세상이게 한 것이 무엇인가를.

나와 나의 가족, 친척, 친구의 행복만을 위해 살았던 가난한 인생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의 질곡의 역사를 광명으로 전환하고자 했던 싯달타의 마음이라든가 지옥이 텅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던 지장보살의 원력, 인류를 몸으로 사랑하다 간 예소, 간디, 테레사 수녀와 같은 인생. 즉 '나'를 '나 아닌 나'로 회향했던 인생들이 우주를 밝혔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공양하노니 이 음식이 시방세계에 두루하여 모든 귀신들이 함께 공양하여지이다."

"나의발우씻은 물이 감로가 되어 아귀들의 배가 넉넉하게 하여지이다."


라고 송하는 곳도 '나 아닌 나'에 대한 의식의 확장이며, 결국 '나'와 '나 아닌 나'를 동일시하는 의식의 변화, 즉 不二의 실현이 아닐까요?


숭늉죽비 2성.

고춧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잘 닦으셨습니까?

한톨의 밥, 고춧가루 하나도 남기지 않으니 음식의 낭비가 없고 설거지 하는 번거로움도 없으며 설거지로 인한 환경오염을 덜고 공동체의 화합과 단결을 고양시키는 이것은 발우공양이 가진 지혜의 일부입니다.


죽비 3성에 발우는 본래 위치로 돌아가고, 우리의 법공양은 끝이 났습니다.

충만하십니까?

법다운 공양이 되셨나요?

대중스님!

조용히 귀기울여 보십시오.

한 끼의 공양을 법다이 할 수 있다면, 치문의 하루, 사집의 한 달, 사교의 한 철, 화엄의 한 해가 법다워지고, 출가승으로서의 이 생이 법다워진다는 내마음의 소리에.


그래서 발원합니다.

부처님!!

한 끼의 공양을 법다이하게 하여지이다.

바로 지금. 이 자리. 이 모습 그대로 법다운 공양이 되게 하여지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수보리들이 대혜스님처럼 고백하게 하여지이다.

"법여시고야法如是故也 법 으레히 이와같은 연고니라."

성불하십시요.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