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계 행_혜명스님

최고관리자 | 2013.08.07 15:02 | 조회 3274



계 행

혜 명 / 사미니과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 하라.

“선 것은 익게 하고 익은 것은 설게 하라”는 雲門의 서장을 배우며

雲門에서 익어가고 있는 사집반 혜명입니다.

저는 발원을 담아 기도 합니다.

“부처님!

이 가사를 수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수행자 되겠습니다.

맑고 향기로운 수행자가 되겠습니다.” 하고...

대중 스님 여러분!

“가사를 수 함에 부끄럽지 않고, 맑고 향기로운 수행자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 질문의 답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선뜻 답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戒律을 잘 행하는 것이 답이며, 맑고 향기로운 수행자가 되어 청정한 승가를 이끌어 가야하는 것이 우리들의 출가의 이유이며 목표임을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율의 내용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삭발염의 한 이 후로 강의 때 마다, 혹은 경전을 공부하는 중간에도 계율을 잘 지켜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鑊湯地獄의 찌짐이가 됨을 경고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계율이라는 것이 2,500년 전 부처님께서 법을 펴시던 때

만들어져 현실과 맞지 않다는 비판도 받는데다, 많은 항목의 구족의 계목들은 하지 말라는 것뿐이니 딱딱하고 어렵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알고 있지만 경직되고 융통성도 없고 공부하기에 재미도 없는 계율을 왜 속속들이 알아야 하고 잘 지켜야 하는 것일까요?

지난 방학 때 한 마음 잡아보겠다고 조석으로 법당에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한 마음은 커녕 번뇌와 망상은 기도를 시작할 때보다 더 깊어졌습니다.

너무 열심히 한다고 팔만사천마군의 시험을 받는 것일까? 아니면 내 기도의 방법이 잘못된 걸까? 하루는 너무 힘이 들어 기도도 접고 새벽 예불을 올리고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하루 종일 방에 틀어 박혀버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戒의 그릇이 온전해야 禪定의 물이 고이고, 禪定의 물이 고여야 智慧의 달이 뜬다”라고 했던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나의 戒의 그릇은 온전하여 선정의 달을 담을 수 있는가?

계절을 잊은 철없는 모기들이 왱왱거리면 아무 죄책감도 없이 “탁”하고 압사를 시켜 살생계를,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느라 망어계를,

공양도 나몰라라 하다 때 아닌 때에 끼니를 챙겨 불비시식계 등등...

“부처님, 불가항력입니다. 이 정도쯤은 ...”하고 떼쓰고 자기 합리화에만 급급했으니 마음이라는 놈이 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던 것이지요.

少少한 계부터 가지가지 계를 지키지 않아 금이가 물이 샐 것 같이 위태위태한 그릇이 되어가고 있었으니 선정의 달그림자는 고사하고 물도 고이게 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佛敎의 倫理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존재의 행동을 기반으로 합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존재는 다른 생명을 헤치지도 남의 것을 훔치지도 성적인 방종으로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으며 거짓말을 하지도 술을 탐닉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물론 계율에 매달리는 것은 기초를 다지는 과정처럼 즐거운 일은 아니며, 스릴 넘치고 재미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기초를 제대로 다져 놓는다면 일이 쉽고 빠르게 진행되고 반대로 기초가 부실하다면 아무리 훌륭한 일이라도 삼재팔난을 만나면 안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초심자인 우리들로서는 계율이라는 기초를 단단히 다져 놓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살생을 하고 절도하고 지저분한 소문을 옮기고 성적인 방종에 빠진다면 마음의 동요가 일어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열반에 들지만 계율이 너희들의 스승이다”하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지닌 계율이 부처님을 대신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항상 공경하고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戒는 모든 공부, 수행, 선정의 바탕이 됩니다.

그러므로 계를 잘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가 지혜와 선정을 열심히 수행하여 법문하는 것만이 부처님의 가르침 펴는 것이 아니라 계를 열심히 잘 지키는 것도 가르침을 펴는 것이니 “계를 지닌 비구니들이 있는 곳은 밝고 빛이 나며 여래가 있는 것이 보인다” 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값어치 있는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것은 사찰을 화려하게 단청으로 꾸미고 그 안을 치장하여 사람들을 많이 모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출가자들이 계를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한국 불교의 대표 율사이신 자운스님께서는 계율을 지키는 것은 자신과의 약속이며 佛法이 세상에 오래 머물게 되는 근본이니 말세에 律風의 진작을 위해 헌신하라고 우리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대중 스님여러분!!!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오 듯 합니다. 이런 少少한 바깥 경계를 핑계로 ‘지금’ 계행을 가벼이 여기지는 않으십니까?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바로 세워 줄 계율를 잘 지켜 내 모양을 보는 이나 내 이름을 듣는 이가 모두 보리심을 발하게 하고 맑은 수행자, 청정한 승가를 만들어 佛法이 세상에 오래 머물도록 하시지 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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