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나를 찾아가는 여정_덕재스님

최고관리자 | 2012.07.26 11:14 | 조회 4479



나를 찾아가는 여정


사교과/덕재

안녕하십니까. 사교반 덕재입니다.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제목으로 법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어려서부터 저는 분별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사탕으로 유혹하는 기독교도 탐탁치않았지만 어머니가 믿으시는 불교도 그리 와 닿지 않았습니다. 명산대찰에 들려 법당에 참배라도 시키면, 왜 저 금색덩어리에게 절을 해야 하는지, 저런 죽어있는 동상이 어떻게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돌봐 줄 수 있다는 것인지......
저로서는 어머니의 믿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커서는 소위 종교라는 것은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바랄 때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현각 스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파란 눈의 외국스님이 한국에 와서 스님이 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지만, 스님의 법문은 ‘나’라는 존재가 보통 사람들이 충고하듯, 세상 사는데 별 도움이 안 되니 잊어버려야 할 대상이 아닌 세상 살림을 접어두고서라도 찾아야 할 중요한 대상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스님의 법문은 불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 중에 구산 스님이 쓰신 ‘석사자’라는 책은 제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1970년대에 외국에서 온 젊은 스님들이 스님의 설법을 번역해서 출간한 영문판을 한글로 정리해서 간행한 책인데, 그 책에서 스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대답하지만 스님께서는 그것이 인류의 평화나 지위, 명예, 예술, 부귀, 자유 등이 아닌 바로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나’ 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나’라는 것은 ‘참 나’와 ‘거짓 나’가 있어서 ‘참 나’는 육신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꿈속에서도 내가 있고, 지금 이렇게 말하는 나도 있습니다. 꿈속의 세계도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고, 그 속에서 부당한 일들을 당하면 꿈이라는 분별심 없이 대항합니다.
그렇다면 꿈속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꿈속의 ‘나’도 ‘나’이고 이렇게 말하는 ‘나’도 ‘나’라면 어느 것이 ‘참 나’입니까?

구산스님은 이 몸은 일시적인 가짜 ‘나’요, 마음은 영원한 진짜 ‘나’이며 마음이야말로 모든 일들을 운전하는 주인공이라고 했습니다. 이 마음이야말로 바로 진짜 주인공이고 ‘참 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나를 찾는다는 것은 내 마음을 찾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하지만 제가 참 나라고 생각했던 주체를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불과 얼마전에 능엄경을 배우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보고 듣고, 추측하고 헤아리는 것은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 대답에 놀란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왜 그것이 진실한 마음이 아닌지를 여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계교하고 사량하는 것은 다 눈앞에 대상에 의해서 생겨난 허망한 망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진짜 마음을 미혹하게 하는 것이라고 답하십니다.

망치로 맞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찾아야 할 대상을 시작부터 잘못알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저를 더 혼란스럽게 만든 부분은 그 뒷부분에 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시방의 여래와 대보살들이 머무는 삼매에는 보는 성품과 보여지는 대상과 의식에 남는 모든 현상이 마치 허공의 꽃과 같아서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는 것과 보여지는 대상이 그대로 깨달음의 묘정명체”라고 하십니다. 즉 앞서 부처님께서 참 마음이 아니라고 하셨던 우리의 분별하는 ‘거짓 마음’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마음’, ‘거짓마음’ 즉 ‘참나’와 ‘거짓 나’ 모두가 그대로 깨달음의 묘하고 밝은 실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느 책에서 읽었듯이, 3일이나 7일안에 깨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수록 나를 찾아가는 여정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자신을 비워나간다는 일’입니다. ‘참나’가 무엇이고 ‘거짓나’가 무엇인지 개념으로 아는 것보다도 더 현실적으로 와 닿습니다. 그리고 고치기가 참 어렵습니다. 출가해서 어른 스님들은 참선은 가르쳐주시지도 않고 자꾸 버리라고만 하셨습니다. 전에 익혔었던 습을 버리고, 견해를 버리고, 아집을 버리고, 분별을 버리고...

‘내가 틀릴 수 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매순간 알아차린다는 것. 나를 비우는 것이 곧 수행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돌이켜보면 깨달음이라는 것을 자신의 한 부분도 버리지 않고, 하루아침에 어떤 완벽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편협한 사고로 사람들과 수시로 부딪치거나 또는 죽은 나무와 같이 현실과 괴리되어서 세상과 소통할 수 없는 그러한 사람들은 아마도 깨달은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저의 물음은 갈수록 끝이 없습니다.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저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경을 익혀갈수록 부처님의 노파심절한 구구절절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시려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끊임없이 설명하고 계시는데 저는 그 깊을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머리로는 십지보살인데 그때그때 일어나는 생각과 내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보면, 중생계에 발을 푹 담그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평소에 자주 되내이던 허허당 스님의 시를 인용하면서 저의 차례법문을 마치고자 합니다. 대중스님 여러분 정진 여일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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