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그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_상법스님

가람지기 | 2011.12.26 13:39 | 조회 3709


그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사교반 상법스님     

 

사교반 상법입니다.

겨울을 겨울답게 해주는 추위가 찾아왔습니다. 작년에 비하면 포근한 겨울이라 이 정도 추위에도 움츠리게 됩니다. 도량에 계절감각을 잊은 꽃들이 피어있는 게 눈에 띕니다. 종무소와 설현당 사잇길에 서있는 매화나무 역시 따뜻한 기운에 봄을 준비하고 있는지 푸른 기운이 돕니다. 짧지않은 3년이라는 운문사에서의 시간이 이 매화나무를 살펴볼 여유를 주는 걸까요? 치문 첫 철에는 그 곳에 매화나무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무슨 정신이 있었겠습니까? 심각한 길치인 저는 운문사에 산지 며칠이 지나도 청풍료 앞, 뒤도 헷갈려하고, 분명 길임에도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하는 동선을 익혀야 했으니 어디에 무슨 나무가 있는지, 꽃은 피었는지 보고 있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처음 중하채공 소임으로 후원에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실수만 잔뜩 하는 저를 걱정하는 별좌스님이 어려워 시선처리를 과하게 한 나머지 내도록 별좌스님 손만 바라보다 소임을 마친 후 후원에서 나오는 순간 이목소 계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곳에는 4박 5일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햇살이 풀어져 나뭇잎들이 온통 파스텔 톤으로 반짝이는 그림 같은 풍경. 저도 모르는 사이에 운문사 곳곳에 완연한 봄이 와 있었습니다. 그제야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저를 봅니다. ‘참 여유 없이 사는구나, 쉬어가자’ 느낍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다니는 길에 서 있는 매화나무도 이목소의 나무들도 하루하루 다르게 싹의 틔우고, 꽃을 피우지만 저는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보고 다니는가?’

집중시각장애라는 심리학 이론이 있습니다. ‘attention blindness' 영어로 하면 더욱 쉽게 다가오는 개념인데요. 사람들은 보고있는 모든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믿지만 어떤 것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겨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이론입니다. 보통 교통사고나 범죄행위 같은 뜻밖의 상황을 목격한 사람에게서 나타난다고 생각하지만 집중시각장애는 우리 삶 어느 순간에나 나타납니다. 제가 항상 다니는 길에 있는 매화를 못보고 지나치는 것처럼 말이지요. 단순히 보고 듣는 감각기관 뿐 아니라 어떤 생각에 갇혀버리면 저는 귀도 닫고 눈도 닫아버립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운문사 생활이 그러했습니다.
맡은 소임에 아등바등하다 익숙해지면 죽비교체! 낯선 사람, 장소, 쏟아지는 인수인계사항. 이 도량 어디에도 제 아래 있는 사람 없습니다. 저보다 낯선 것이 많은 사람 또한 없습니다. 남들보다 부족하다는 생각에 잘하려다보니 조그만 실수도 용납지 못합니다. 경주용 말은 시합에 집중하도록 눈 옆을 가려 앞만 보고 달리게 합니다. 저도 어느새 바깥세상에서 하듯 잘하려, 인정받으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용 말이 됩니다. 당연히 지나치게 긴장하게 되고 몸과 사고는 그대로 굳어져 오히려 실수만 잦아집니다. 결국 ‘나는 못해, 나는 안돼’ 결론지어 버리며 자책하는 제가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에 갇혀버리면 바늘 하나 꽂을 곳 없이 마음이 잔뜩 조여지며, 오로지 바깥 경계에 지독히 끄달릴 뿐입니다. 그리고는 생각하지요. ‘이번 일만 끝내면, 이번 소임만 끝나면..’ 날이 잔뜩 서서 저를 치고, 다른 사람을 치고 나서야 ‘어찌 이리 여유가 없이 사나’ 후회합니다.
은사스님께서 운문사에 보낼 때 ‘잘하려고 하지 마라, 그저 중간만 가거라’ 당부하시던 말씀은 이미 개념이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가장 쉬울거라 생각했었는데 말이죠.

저는 이제 제 스스로 씌운 눈가리개를 풀어버리려 합니다. 잘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나는 못한다는 생각마저 내려놓습니다. 과거의 실수와 남겨진 소임에 치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옵니다. ‘남들보다 늦어도 진심을 담아 하루하루를 보내자’ 라는 생각이 확고해지자 여유는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리고 무엇을 놓치고 사는지 천천히 살펴봅니다.

운문사는 한창 불사 중입니다. 건물이 조금씩 세워지듯 저희 마음도 불사를 계속 해야 한다던 강사스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남아 저를 일깨워줍니다. 저는 여전히 부족한 사람입니다. 여전히 여유를 잃고 생각에 갇혀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의 나로 돌아오려는 순간순간의 알아차림이 결국 저를 단단하게 지탱할 힘이 되리라 믿어봅니다.

대중스님들께서는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어떤 생각에 갇혀 잃는 것이 있지는 않으신지요. 나무들도 추위에는 불필요한 나뭇잎을 떨구고 새로움을 준비하는 계절인 겨울은 그런 것들을 살펴보기엔 더없이 좋은 시간이 아닌가 합니다. 정진 여일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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