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길_현진下 스님

최고관리자 | 2013.03.14 13:30 | 조회 3150



현 진下 / 사미니과   

안녕하십니까. 치문반 현진下입니다.
만물이 소생하고 아지랑이 피는 봄에 몸은 노장이라 우스개소리 들으며 마음은 새내기 학동이 되어 입방한 게 바로 어제 같습니다. 2012년 잘 살았다는 환희심보다는 뒤늦은 후회도 들지만 갈무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 이 귀중한 자리에서 ‘길’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어른 스님 모시고 대중스님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대중스님 여러분!
우리 도량에 들어온 후 매표소 초입에서 보면 인고의 흔적을 이겨낸 소나무숲 사이로 흙길과 포장도로 길이 나 있는 것을 다 아실 겁니다. 그 길은 제가 갈마보러 왔을 때 처음 걸었고, 강원생활하면서 출타할 때 다니는 길입니다.
유독 차멀미가 심해 속을 진정시키려 차에서 내려 혼자 걸어온 날이었습니다. 강원생활 특성상 혼자 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에 한적한 마음에 두 갈래 길을 보면서 어느 길로 걸어갈까 생각하다가 흙길로 걷게 되었습니다.
걷다보니 중간 중간에 패여 있는 웅덩이와 저의 불편한 발걸음에 채이는 돌 때문에 편치 않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옆에 잘 닦여진 포장도로 길에 눈길이 가면서 그 길로 걸어가지 않은 걸 후회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우리 삶의 길도 두 갈래 길처럼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보에 따라 세간의 오욕에 집착하여 삼도의 수레바퀴 속에서 윤회하는 중생의 길과, 미혹한 중생의 삶과 고통의 근원을 깨우치시고, 그 해결방법을 제시하며, 각기 인연법에 따라 고통을 소멸시키시는 부처님의 길처럼 말입니다.

대중스님 여러분!
‘길’, 길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두 갈래의 길을 보면서 이렇게 정의해 보았습니다. 한 길은 중생의 삶처럼 길의 여정에 순응하여 도착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다른 길은 출가의 삶처럼 여정 중에 삶의 의미를 찾아 판로를 바꾸어서 도착하는 길입니다.

수행의 삶을 알기 전에는 ‘혈연’이 전부라 알고 삶이 다하는 그 날까지 꼭 함께 해야 한다고만 알고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어릴 적 부모님의 결별로 저를 낳아준 어머니와의 헤어짐, 새어머니와 함께 한 유년 시절, 장성한 후 다시 만난 어머니였지만 교통사고로 다시는 함께 할 수 없다는 허망함, 그리고 사고 후유증에 몸의 장애까지 앞으로의 삶을 생각해 볼 때 도무지 자신감이 없었고 절망감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저에게는 소중한 것도 감사하다는 것도 모두 다 거짓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삶의 가면을 벗고자 돌파구를 찾게 되었습니다.

두 분의 비구니 스님이 기거하시는 작은 암자. 가까운 듯 하면서도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출가의 길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평온함 속에서 무섭게 느껴지는 스님들의 결단력 있는 모습에서 제가 걸어가지 못한 후회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나 자신과의 줄다리기였던 질긴 속가 인연의 끈을 놓아버리고 암울했던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 답이 바로 ‘출가’였습니다.

이제, 일대사 인연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 길의 첫 발자욱을 떼어 강원에 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첫째로, 대중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고 몫을 챙김에 있어서 대중을 뇌롭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치문 시간에는 조사의 어록을 통하여 수행자의 참다운 바탕을 배웠고, 사성제를 통해서 오온으로 이뤄진 이 몸이 고苦의 실체며 시발점임을 알았으며, 허망한 집착으로 인한 인과인 12인연법까지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미니 율의 시간에는 수행에 있어서 복덕의 선근이 있어야만이 계戒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행자 때처럼 강원 생활을 하던 중에 또 다시 핸디캡인 몸의 끄달림이 시작되었습니다. 후원소임과 중소임을 살지 못한다는 자격 상실감에 저는 점점 의욕을 잃어갔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분노와 퇴굴심에 생활은 엉망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경상 옆 도반스님의 독서대에 있는 경허 대선사의 성구聖句를 보게 되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산과 같이 하고, 마음 넓게 쓰기를 허공과 같이 하고, 남보기에 쑥맥같이 지내고, 병신같이 지내고, 벙어리 같이 지내고, 소경같이 귀먹은 사람같이 그리고 어린아이 같이 지내면 망상이 사라진다.”
그 동안 어떤 마음가짐이었던지가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아만심에 정녕 하심을 잃어버리고 살아온 것이었습니다. 첫째도 하심이요, 둘째도 하심이었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도 하심만이 참다운 공부라는 가르침을 까마득하게 잊고 산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이 길에 선 저는 공부할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고, 생을 받은 이 몸 있음에 감사할 수 있고, 사바세계에 태어났음을 감사할 수 있고, 먹물 옷을 입게 하여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이 지중한 은혜를 갚고자 공부 길에 들어섰습니다.
가을 결제 법문 때 설정 큰스님의 “신심은 샘물처럼, 원력은 화산처럼, 공심은 햇볕처럼”이라는 그 말씀을 나침반 삼아 신심일여하게 정진해 나아가겠습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대발원과 저의 출가로 구족이 생천한다는 서원이 퇴색되지 않기를 서원하며 이만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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