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불기자심 不欺自心-사교반 해묵

가람지기 | 2026.01.11 14:26 | 조회 45

불기자심 不欺自心

 

안녕하십니까? 사교반 해묵입니다.

여러분 제 말이 들리십니까?

오른팔을 한번 올려보실까요? 이번엔 왼팔을 한번 올려보십시오.

여러분 그 팔을 드는 자가 누구입니까?

사실 오른팔’ ‘왼팔하는 소리는 우리의 흉근과 성대를 이용해서 내는 하나의 진동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어떤 의미가 있는 소리로 이해해서 몸으로 수행합니다. 저는 예전부터 이런 것들이 어떻게 가능한지 참 궁금했습니다. 우리는 말이나 행동을 하기 이전에 먼저 생각을 일으키지요. 그런데 그 생각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이 질문은 출가 전부터 저의 오랜 화두였습니다.

다시 누가 팔을 들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제 이름을 들어서 해묵이 팔을 들었다라고 답한다면 해묵이라는 이름은 내일이라도 바뀔 수 있는 이름일 뿐이지요. 만약 제가 제 몸을 가리켜서 이 몸이 팔을 들었다라고 답한다면, 몸이라는 것은 따져보면 경계를 짓기가 굉장히 모호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손가락이 하나 잘렸다면? 여전히 라고는 하겠지요? 그런데 그 잘린 손가락도 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몸이 어디까지 있을 때 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몸을 나라고 한다면 죽은 시체도 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대 과학자 중 다수는 의식이라는 것이 단순히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조만간 우리는 보고, 듣고, 말하고, 감정을 느끼고 학습하는 인간과 똑같이 생긴 AI를 만나게 될 수도 있는데, 여러분들은 그것들을 살아있는 생명과 똑같이 여기시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윤회와 무아를 둘 다 설하셨는데 무아이면서 동시에 다음 생으로 나를 끌고 가는 주체인 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여러 종교마다, 종파마다 다양한 이론으로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지식으로 안 것은 체득한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이러한 물음에 2500여 년 전에 직접 그 길을 가셔서 우리에게 답을 알려주신 분이 있습니다. ,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우리는 매 찰나 어디로 가는지 완벽히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지구에 핵폭탄이 터질지 청풍료가 무너질지 그 누구도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다음 찰나에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한마디 이르지 못한다면 이 일대사를 해결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사를 해결하지 못한 채 육도를 윤전 輪轉 하는 자신에게 분개심을 느끼십니까? 이 일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는 것은 양심에 장막을 씌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이 일을 해결하는 것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토록 중대한 일에 왜 뼈저리게 사무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제부터는 제가 떠올린 다섯 가지 자기기만을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증상만입니다. 증상만이란 일곱 가지 가운데 하나로, 자신이 이미 어떠한 수행적 과를 이루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명상이나 참선을 하다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타심통이 생기거나 자신이나 남의 과거나 미래가 보이는 경우 등입니다. 이 이야기가 지금은 다소 멀게 느껴지실 수 있겠습니다만 생각보다 흔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큰 문제인 이유는 자신이 깨달았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수행 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꼭 부처님의 가장 심오한 법문이나 조사 어록을 참고해서 자신이 그것들에 밝은지, 또 선지식을 찾아가서 공부를 제대로 점검하여야 할 것입니다. 초기 경전에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등 사문사과 沙門四果 가 나오고 화엄경 등 대승 경전에도 십지 十地 등 여러 가지 수행 계위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수행의 과정이 절대적이지는 않더라도 반드시 점진적인 의식적 전환이 있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둘째로는 경전이나 선어록을 해석할 줄 아는 것을 마치 그것을 증득했다고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여러분, 수영을 잘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영장에 가서 수영 선생님에게 발차기부터 물에 뜨는 법과 헤엄치는 법을 몸으로 익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수영하는 법을 정리해 놓은 책을 읽고 또 학문적으로 그 이론만 탐구한다면 과연 수영을 잘할 수 있을까요? 물론 도움이 아주 안 되지는 않겠지만 실제로 물에 들어가 보지 않고는 절대로 수영을 익힐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을 때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면, 즉 생사윤회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면 법을 증득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는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들의 말씀을 각자가 가진 소견대로 받아들이고 마는 경우입니다. 마조 선사는 평상심시도 平常心是道를 설하셨고 임제 선사는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설하셨습니다. ‘평상심시도평소 마음이 곧 도이다로 직역 되고 이 말은 언뜻 듣기에 평소 마음이 곧 도이니 수행이라는 것이 따로 있지 않다는 말로 들을 수 있습니다. 수처작추 입처개진머무르는 곳에서 주인이 되면 그곳이 바로 진리의 자리이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자리에서든지 최선을 다해 주인으로 살아라정도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들을 일반적인 교양과 지식으로 해석해버리면 그 본뜻을 크게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해석에 쉽게 틀렸다는 잣대를 들이댈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우리 출가자들은 이 말씀들이 모두 깨달음의 분상에서 설해진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마조 선사가 평상심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셨는지 볼까요? '평상심이란 '무조작 無造作', '무시비 無是非', '무취사 無取捨'이다, 꾸민 마음, 시시비비에 헤어나지 못하는 마음, 화내거나 분노하는 마음, 좋아서 흥분하고 싫어서 우울한 마음과 같은 중생심이 없는 상태가 평상심이라는 말입니다. 곧 평상심이란 해탈의 마음이자 부처의 마음이고 다시 말하면, 각고의 정진 끝에 이르게 되는 것이 평상심이지 지금 우리가 가진 중생심의 상태가 평상심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 앉아계신 분들은 이미 평상심을 경험해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아실 겁니다. 우리 수행자들은 이런 해석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넷째로는 비판여래 裨販如來, 즉 부처님을 팔아 자신의 아상을 채우는 경우입니다. 전법을 하거나 공덕을 쌓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자신이 펼치고 싶었던 재능과 능력을 한껏 부리며 명리를 채우고 있지는 않은지 잘 점검해 봐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포교란 어떤 것인지 내가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전반 되어야 하는지 숙고해 보고 따져봐야 합니다. ‘문아명자면삼도 견아형자득해탈 聞我名者免三途 見我形者得解脫이라는 행선축원의 구절처럼 지금 나의 모습을 보고 상대가 감화되지 않는다면 포교보다는 반작용이 일어날 것입니다. 내가 이익, 명예, 칭찬, 편안함, 손해, 비방, 비난, 괴로움 등의 팔풍 八風 에 휘둘리는 상태라면 어떻게 많은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을까요? 선가귀감 평에는 스님의 본분도 비껴가고 속인의 신분도 피해 가는 박쥐승, 혀는 있으되 법을 설하지 못하는 벙어리 아양승, 겉모습은 스님이지만 마음속은 속인이나 까까머리 거사인 독거승, 죄가 무거워 돌이킬 수 없는 지옥재, 부처님을 팔아 생계를 도모하는 가사 입은 도적이 나옵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는 되지 않도록 자신을 기만에서 잘 구제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부처의 궁극적인 행은 보살도이기에 깨달음을 미루고 보살행을 한다는 경우입니다. 여러분, 완전한 대비심이란 자타가 끊어진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그 경지에 가기 이전에 하는 보살행은 ’, 즉 인간으로서 각자가 가진 관념 아래에서 하는 행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행의 인과에 대해 완전히 밝지 못하게 되고, 여러 가지 모순에 부딪히거나 종종의 업을 짓게 될 수 있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약보살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則非菩薩, ‘보살에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로 미루어보면 우리가 일체 고정관념인 상을 여의지 않는다면 색성향미촉법 色聲香味觸法 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할 수 없고,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보살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금강경오가해에서 육조스님은 심유능소 心有能所 하면 즉비복덕성 卽非福德性 이요 능소심 能所心이 멸 하야사 시명복덕성 是名福德性 이라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복덕이 되지 못하고 능소가 사라져야지만 복덕이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살이 상에 머물러 보시하면 그 복덕은 유위 有爲 의 복덕은 될 수 있을지언정, 무위 無爲 의 복덕, 즉 해탈에 도움이 되는 복덕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도리는 양 무제와 달마 대사의 일화에서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양 무제는 달마 대사를 만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절을 짓고 경문을 직접 옮기기도 했으며, 많은 스님을 지원하였소. 앞으로 내가 얼마나 많은 복을 받게 되겠소?” 달마 대사는 라고 하셨습니다. 대중 스님들은 이 도리를 아시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육바라밀은 언제까지나 수행의 목적이 아니라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방편임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방금 제가 한 말은 수행의 목적과 방편을 전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완전히 끊고 자신만의 수행을 챙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종색 선사는 좌선하는 법의 첫머리 학반야보살 學般若菩薩 은 선당기대비심 先當起大悲心 하고 발홍서원 發弘誓願 하며 정수삼매 精修三昧 하야 서도중생 誓度衆生 이요 불위일신 不爲一身 하야 독구해탈 獨求解脫 이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먼저 대비심을 일으켜야 하고 큰 서원을 발하며 삼매를 정밀하게 닦아서 중생을 제도하기를 서원할 것이요, 자기 한 몸만을 위해서 해탈을 구하지 말아야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좌복에 앉기 이전에 모든 중생을 위한 대비심을 일으키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 마음이 없다면 선정에 깊이 들 수도, 부처를 이룰 수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수행자들이 수행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몇 가지 착오들에 관해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발심해서 가족, 직업,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물건들을 다 놓고 여기에 와서 부처님의 가사를 수하신 여러분, 앞으로 눈을 감을 때까지 무엇에 삶을 바쳐서 정진하시겠습니까?

아인망처초삼계 대오진공증법신 我人忘處超三界 大悟眞空證法身

무영수두화난만 청산의구겁전춘 無影樹頭花爛漫 靑山依舊劫前春

아상 인상이 끊어진 곳에서 삼계를 초월하고 진공을 크게 깨달아 법신을 증득하니

그림자 없는 가지 끝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청산은 옛을 의지하여 겁 이전의 봄이로다.

釋門儀範』 「大禮懺禮-

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 모두 함께 일도정진 一道精進 하여서 필경무불급중생 畢竟無佛及衆生 을 이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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