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자유게시판

자유로운 주제가 가능한 공간입니다.
그러나 부적절한 게시물이나 글은 삼가해 주시기 당부드리며, 광고성 글이나 부득이한 경우 삭제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숙연토록 아른다운 산양 이야기

백두대간 | 2010.06.23 17:19 | 조회 3980

숙연토록 아름다운 산양 이야기


 

최후의 분대장으로 잘알려진 꽂꽂한 성품의 조선족 작가 김학철옹이 쓰신 "우렁이 속같은 세상"(창비, 2001)에는 감동적인 산양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들의 흔적을 따라 다니는 나로서는 머리털이 쭈뼛서고 소름이 돋는 감동을 맛보았고 사람들 세계에서처럼 짐승들의 세계에도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음을 보았다.



숙연한 산양 이야기

깊은 산속에서 포수들과 몰이포수들이 한무리의 산양떼를 발견하고 이를 모짝 잡아볼 요량으로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방향으로 자꾸 몰아붙였다. 쫓기다 ~ 쫓기다~ 끝내 절벽끝에 다다른 산양떼는 금세 공황상태에 빠져들어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들 했다.


천길 나락을 사이에둔 맞은편 역시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인데 그 사이의 간격은 약 6미터, 제아무리 날쌘 산양도 뛰어넘을 수가 없는 거리였다. 거물스럽게 생긴 인솔산양이 혼자 낭끝에 나서서 잠시 살펴보더니 결심을 내린 듯 이내 돌아서서 길게 한마디를 위엄차게 우짖었다.

 


그러자 황황겁겁하던 공황상태가 금세 물을 친 듯이 가라앉으며 곧 뭇산양이 두 패로 갈리는데 한쪽에는 사람으로 치면 청소년층이 또다른 한쪽에는 노장파가 각각 나뉘어 섰다.다 갈라서고 보니 청소년 쪽이 수가 좀 많은 듯하니까 그중의 비교적 나이먹은 몇마리가 곧 자리를 떠서 노장파 쪽으로 건너와 두 패의 머릿수를 엇비슷이 맞추었다.


일다 정돈이 된 뒤에 인솔산양이 뭇산양을 둘러보며 다시 한번 길게 우짖으니 두 패에서 산양이 각각 한마리씩 짝을 지으려는 듯이 동시에 앞으로 걸어나왔다.두 마리의 산양은 곧 제식동작처럼 함께 뒷걸음질을 치다가 거의 동시에 전속력으로 앞으로 내달아 낭끝에서 도약을 하는데 일고일저(一高一低), 젊은 산양의 자릿길은 높고 나이든 산양의 자릿길은 자칫 낮았다.

 


산양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개개 다 뛰어난 멀리뛰기의 선수들이다. 하지만 그 극한은 5미터 정도, 더는 뛰지 못한다. 위아래 두 산양이 공중에서 거의 한계점에 도달할 즈음 젊은 산양의 발굽 밑에는 마침맞게 나이든 산양의 잔등이가 위치하게 됐다. 그러자 젊은 산양은 그 잔등이를 도약판으로 삼아 한번 힘껏 굴러서 재도약을 했다.


젊은 산양은 무사히 건너가 살고 나이든 산양, 즉 도약판이 되어준 산양은 천길 나락으로 꽂꽂이 떨어져내려갔다. 날개 부러진 고니마냥... 총알맞은 기러기마냥...
이렇듯 비장하고 처절한 공중묘기가 빈틈없이 또 질서정연하게 되풀이되는 동안 인솔산양은 줄곧 이를 전심치지(全心致之) 지켜보고 있었다.


그 공중묘기가 다 끝나고, 저 혼자 짝이 없는 외톨이로 남게 된 인솔산양은 천천히 하늘을 우러러 슬프게 한마디를 길게 우짖었다. 그러고는 곧 낭떠러지 아래로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니까 산양의 무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구성원의 절반을 희생하고 나머지 절반을 살린다는 비상한 방법으로 그 공동체를 계속 유지했던 것이다. 이 놀라운 광경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포수들은 모두 넋을 놓고 자신들이 무엇을 하러 왔는지를 잊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개중에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들고 숙연히 머리를 숙이는 포수까지 있었다.


이상은 산짐승들의 세계에서 벌어진 극적이고도 감동적인 한장면이다.

 

 

 


twitter facebook
댓글 (0)
주제와 무관한 댓글, 악플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