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자기성찰의 시간 - 석인스님

가람지기 | 2010.06.28 15:25 | 조회 3560

 

"신심으로써 욕락을 버리고 일찍 발심한 젊은 출가자들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똑똑히 분간하면서 가야 할 길만을 고고(孤高)하게 찾아서 가라"

안녕하십니까? 화엄반 석인입니다.

출가이래로 거의 매일 독송해온 천수경구절도 가끔 놓치는 저이지만 어쩐지 200여명 대중스님 앞에선 떨리는 이 순간에도 선명한, 대율사 우바리존자 게송은 그만큼이나 제게 큰 환희심으로 마음 깊은 곳에 둥지를 튼 듯합니다.

지난 봄방학, 개학후면 얼마지 않아 차례법문을 할 순서라 생각하니 과연 어떤 주제로 대중스님들의 소중한 시간을 헛되지 않게 할 수 있을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연한 걱정만으로, 단 한 줄의 원고도 장만하지 못한 채 여름철은 시작되었고, 급기야 하루 앞으로 다가온 어제도 걱정만 하며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법상에 오른 지금, 대중스님들께는 참으로 죄송한 마음이지만, 지난 4년의 운문사 생활을 더욱 여실히 돌아보게 하는 이 자리를 감사해하며 몇 말씀 드리고 내려가려합니다.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
말 그대로 한순간, 이 순간에 있을 뿐, 결코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만이 영원한 것인 듯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굳게 믿고 출가한 수행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리고 제 삶은 어떠했을까요?

지난 4년 운문사 생활이 한 점 부끄럼 없이 알찬 것이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법문하기가 한결 쉬웠을 듯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고 대중스님들, 특히 함께 지내온 55명 도반들이 더 잘 아는 사실입니다. 쏜살같이 흘러간 운문사 생활의 대부분이 순간의 시비분별로 채워진 것을 말입니다. 때로 조금의 선근공덕으로 나를 추스르고 마음을 돌이킬 때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얼굴 붉어지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그야말로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이제 6개월 후면 학인이라는 이 든든한 보호막마저 떨어져 나가고, 성글은 제 부끄러움들이 굳어져 후회하는 못난이가 될지도 모르는 위태로움마저 드는 요즘입니다.

치문 수업시간,
‘마음 닦는 공부하고자 출가했지만 반드시 몸으로 얻어지는 것이 있다’고 하신 강사스님의 말씀이 흉허물 많게나마 이 자리까지 저를 오게 한 큰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힐 때면 눈을 감고 그려봅니다. 멋진 수행자로서의 제 모습을요. 나를 다듬고 그릇을 넓혀갈 때 삶이 더욱 맑고 평온하리라 믿습니다.

사소한 충동과 욕구들에서 갈등이 움트고 자신과 타협하며 스스로의 굴레 속에서 속는 줄도 모르고 속는 나를 봅니다. 자유를 갈망할수록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모래위의 누각 같은 생활을 반성하며 순간순간 깨있고 싶습니다.


물경소사(勿輕小事) 불기자심(不欺自心)

운문사에서 얻은 제 좌우명입니다. 작은 일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양심이라야 진정 가는 곳마다 주인 될 수 있으리라 믿으며 남은 운문사 생활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대나무 그림자가 뜰을 쓸어도 먼지일지 않고, 달이 못 속에 들어가도 물에는 흔적이 없습니다. 상대에게 거리낌 없는 존재일 수 있음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북돋아 가꾸지 않는다면 힘든 일입니다. 돌아보면 저는 존재 자체의 버거움으로 괴로워하며 그것이 마치 내게만 있는 일 인양 세상을 향해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진솔하게 받아드릴 때 그리하여 타인에게 여유로움으로 다가설 수 있을 때 나 자신의 삶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마음에 새겨보지만, 또다시 들뜨는 감정을 추스르기가 힘겨운 날들입니다.

선지식 만나고 법도반 구하기를 발원해왔지만 우선은 스스로가 성실한 제자이고 좋은 도반이어야 하겠지요. 오늘 이 자리에서 쏟아낸 저의 고백을부디 대중스님의 힘을 빌려서라도 순간순간 잊지 않을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겠습니다.

도량에 보리좌 꽃이 만개하였습니다.


현금즉시(現今卽時) 갱무시절(更無時節)

임제선사의 말씀처럼 지금 바로 이때가 마음 꽃을 피울 때이지
어찌 다른 시절을 기다리겠습니까? 대중스님,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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