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업과 운명 대하여 - 반요스님

가람지기 | 2010.07.28 14:00 | 조회 3547

 

온 도량에는 능소화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찌는듯한 더위, 땀이 나는 줄도 모르고 뛰어다니는 치문반 종두대장 반요입니다.
저는 그동안 업과 운명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모든 불자님들이 금강경이나
지장경, 관세음보살 보문품등 또는 108배, 500배 천배, 삼천배등
많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들과 우리에게 다가오는 업이나 숙명적인 것들과는 어떤 관계인지.?

기도를 하면 업이 녹는다고 하는데 그 업이 녹는다고 다가 올 운명이 멈춰지거나
일어날것이 일어나지 않거나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수행자들에게도 삼세의 없이 한생에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치문에서 위산대원선사 경책에도 이런글이 있습니다.
‘古經云, 假使 百千劫이라도 所作業은 不亡하야 因緣會遇時에 過報를 還自受라하니’
‘「일체유부경」에서 이르기를 가령 백천만겁이 지내도 지은바 업이 없어지지 않고
그 업을 드러낼 인연이 만나는 때에 과보를 스스로 돌려 받아야만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가령 운문사 치문반 도반들과 함께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어느생엔가 함께 탁마하던 도반들이였음은 분명한 것 같은데
이 많은 41명의 인연이 다 사이가 좋은 순 없을 겁니다.
그 중에서도 아주 안 좋은 사이의 도반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번 치문반 도반으로 함께 있으면서 사이는 여전히 않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가한 수행자와 속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여전히 미워하고,
악연은 여전히 만나고, 모든 것이 되풀이 되고 윤회하는 속에서........

이런 의문들 속에서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었 이었나를 알음알이로
하나씩 의문지으며 풀어가는 속에서 강사스님께서 수업시간에
“영명자각 수선사 수계”글 中
‘自不積業力所牽하고 更敎人 撥無因果라.’
업력에 끌려 다니는 자신을 스스로 책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인과란 얹는 것”이라고 가르친다.’에서
백장선사의 여우 오백생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백장이 설법하고자 법상에 오를 때마다 한 낯선 노인이 승려들을 따라
법당에 들어와 청정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법문이 끝나고 다 돌아간 후에 그 노인이 아직 서성거리고 있음에
백장이 다가가 누구냐고 묻자 그 노인은 대답하기를 저는 사실 사람이 아닙니다.
저 옛날 가섭존자께서 계시던 때에 저는 이산의 방장 이었습니다.
한 학인이 와서 묻기를 높은 경지의 도를 닦은 수행자도 인과의 법칙에 따르냐고 묻길래
 ‘저는 불락 인과니라’ 그런 사람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까닭에 너는 오백세 동안 여우로 변신하게 되었습니다.
청 하건데 화상께서는 올바를 말씀을 해주셔서 이 여우의 몸을 벗게 해 주십시오.”

백장은 이에 대답하였습니다.
“그대가 나에게 다시 물으라”
노인이 묻기를
“깨달은 이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이에 백장이 대답하였다.

“불매 인과니라 그는 인과의 법칙을 모르지 않았소!”
이 말에 노인도 크게 깨닫고 백장에게 배례를 표하며 말하였다.
“저는 이미 여우의 탈을 벗었습니다. 청컨대 저를 스님네 법도대로 묻어주십시오.”
다음날 뒷산에 한 동굴로 가 보니 한 마리 여우 시체가 있었습니다.
스님네의 다비장으로 치러주었다고 합니다.

“불매인과”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과에 매이지 않는 것,
인과에 어둡지 않는 것. 부처님께서도 전생의 인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말들이 먹는 말먹이 사료를 잡수시며 인과의 법칙을 따르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에 매이지 않고 수행력으로 인과를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되 함이 없는 마음, 무위법으로 말입니다.

대중스님 여러분.!가령 인과에 의한 운명적인 만남에서 차를 마셔야 한다면
그 사람과 앉아서 한잔을 마실지, 두 잔을 마실지, 이야기 하면서 한잔도 안 마실지,
10잔을 마실지는 현재 우리들의 각자에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운명이란 수행하는 이의 수행력에 의해서, 자유의지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일체유심조라 했습니다. 좋지 않은 관계의 운명적인 만남에서도 수행력으로서
평온한 마음으로, 관대한 마음으로 상대를 받아들인다면 좋지 않은 관계는
그 순간 사라지고 업을 멈추는 것이 됩니다.

지금 제가 법문 할 수 있는 것도 우연 아닌 필연일 것입니다.
이 필연 속에서 지금 내가 물을 마실지, 안 마실지, 반잔만 마실지는
지금 현재의 나의 자유의지 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찰나찰나를 깨어서 생활하며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인연의 고리들을 어둡지 않고, 매하지 않게 지혜를 밝힐 수 있도록
열심히 수행정진 해야 할 것입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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