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하나되는 연습-사교반 동석 스님

가람지기 | 2009.10.05 10:18 | 조회 3088

치문 첫 철, 부처님 오신 날 낮에 등을 달고 뒤이어 어두워 질 무렵, 이미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에도 아랑곳 않고 반 스님들은 모두 함께 신이 나서 등에 불을 켜기 시작했습니다. 차츰 빗방울이 굵어졌지만 거의 모든 등이 밝혀졌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떠들썩하던 반 스님들이 들어가고 난 다음, 비로전 계단 위 뜰방에 서서 대웅전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빗방울에 톡톡 부딪치며 흔들흔들 달려있는 오색 등의 모습들은 마치 지금 제각기 재잘대는 우리의 모습들과 닮아 있었습니다. 생긴 모양도 색깔도 가지가지이지만 분명히 그 속의 염원들은 한 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에 담긴 가족의 행복, 건강, 시험, 화목 등등 제각기인 것 같지만 역시 결국엔 하나입니다. 내 가족이 잘 되려면 나의 부모님, 친구, 형제의 친구 또 그 친구 그렇게 주위 환경에 공존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편안히 다 잘 돼야 합니다. 바로 어느 한 사람만이 아닌 모두가 행복해야만 그 바램들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혼자만의 행복은 어쩜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처음 운문사에서 느낀 것은 적삼주머니에 참 많은 물건을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내게도 내가 모르는 무한한 지혜가 내 속에 들어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내심 어서어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정말 짧은 시간에도 다양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속에서는 포기할 만한 짧은 시간을 운문사에서는 절대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포기가 희망으로 부정이 긍정으로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어진 시간에 해내기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척척 해내는 스님들의 모습 속에서 그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도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위안과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정랑을 자주 가는 저로서는 아직도 치문 첫 철 정랑 이용이 자유로워졌던 때의 기쁨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규제 속에서 불편함을 느끼다가 규제가 하나씩 풀어질 때마다 자유로워지자 지금 제가 갖춘 모든 멀쩡함에 대한 감사함과 만족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 순간 그 자유로움에 대한 감사함 속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제가 가진 온전한 감사와 행복을 심신이 자유롭지 못한 모든 고통 받는 그 무엇들에게 돌려주어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집 첫 철이 끝나갈 무렵, 강사스님께서는 과제라며‘죽기 전에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적어보라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먹고 싶은 라면 실컷 먹어 보는 것, 빨리 화엄반이 되고 비구니계를 받는 것, 외국이나 우리나라 사찰을 여행하는 것 등을 생각했지만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니 처음에 절 집에 오겠다고 생각했을 때, 만나보았던 제 본성과 마찬가지로 역시 저는 오직 하나만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지금 당장 고통에 처해 있는 모든 생명들을 위해 기도하다 죽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조금만 다쳐도 아파하고 위기 상황에서는 매우 두려워하며 제 몸을 사리지만 이것은 거짓의 나임을 압니다. 두려워하고 몸을 사리는 그 속에서도 타인이 막상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전후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달려드는 또 다른 제 안의 저를 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같은 본성이란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보았던 ‘식객’이라는 영화 속에서 송아지가 죽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저녁 기도 시간에 정근을 하면서 그 장면이 문득 떠올라 송아지가 느꼈을 것 같은 통증이 제 가슴으로 이어져 실제로 무척 아팠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 또한 우리가 따로 있지 않다는 증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가 하고 싶은 이 하나를 이루려면 지금 내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것, 공부 열심히 하는 것, 제가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충실히 사는 것일 겁니다. 뜻을 이루려면, 남에게 들은 좋은 이야기나, 경에 있는 말을 바로 그 자리에서 실천함과 동시에 나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도 들려줌으로써 두루 퍼져나가게 해야 합니다. 듣기만 하고 버리면 자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머리로 아는 공부가 아니라 가슴으로 알아지려면 하기 싫은 일이라도 옳은 일은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자신을 찾으려고 모인 우리인데, 지금 서로의 거짓의 모습에 속아서 언행만을 바라보며 분별을 짓고 속단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를 찾아갈 수 있도록 수행의 길을 도와주는 서로의 스승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스승입니다. 무엇이든 알고 보면 다르지 않습니다. 곧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이렇게 모두 하나이기에 지금 제가 바라고 있는 바람은 우리 모두의 바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대암에서 내려다보면 운문사가 참 복이 많은 도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정작 그 복밭에 사는 저는 복이 많은 줄을 잘 모르고 사는 것 같습니다. 도량이 넓고 스님들이 많은 만큼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지천에 널려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수행으로 받아들이면 복이 되고 미움의 씨앗으로 삼으면 이 큰 복 도량이 미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다른 나라에선 단 몇 초에 한 명씩 아사하고 있다는 강사스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면 그저 감사히 먹고, 감사히 쓰고, 감사할 수 있음에 제대로 감사할 줄 알면 수행에 큰 도움이 되고, 그 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오히려 복을 감하게 됩니다.

저도 감사할 줄 모르고 화를 참 많이 내는 사람입니다. 화라는 것은 또 다른 화를 불러서 윤회를 만듭니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그 사람은 또 기분이 나빠서 어떻게든 분출구를 찾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아무 상관없는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고 그렇게 화의 에너지가 전달되어 눈덩이처럼 불어나 점점 더 멀리 갑니다. 그렇게 그렇게 세상은 화 덩어리가 됩니다. 한 번 화를 내어 전체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상대방이 혼자 힘으로 풀어내기 어려운 화를 녹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 화에 빠져 함께 업을 짓기도 합니다. 감사함에 대한 회향은 어쩌면 작은 실천과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사교 첫 철 반 회계 소임을 살며 자기주장이 더 강해진 스님과 반면 너무도 조용해진 반 스님, 이렇게 확연한 차이를 느낍니다. 회의할 때 보면, 시끄러움에 항상 걸려 진행이 더디 갑니다. 조용히 집중하면 말 속에서 상대방의 뜻이 보입니다. 집중하지 않아서 잘 듣지 못해 옆 사람에게 물어보는 순간, 또 그 다음 말을 놓칩니다, 또 놓칩니다, 그렇게 항상 영영 현재에 살 수 없습니다. 침묵하면 이야기를 통해 그 전후 상황을 모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조용히 하면 그 속은 하나입니다. 그렇게 하나 되는 연습을 합니다.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익숙해지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들어줍니다. 그러다보면 정말 말해야 될 때와 들어야 할 때를 분명히 알아지는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운문사 대중 속에 살면서 저는 늘 어릴 때 들었던 옛날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지옥과 천당에선 음식을 먹을 때, 팔 길이만큼이나 긴 젓가락만을 사용해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데, 천당에선 서로를 먹여주기 때문에 평화롭게 잘 먹고 잘 살지만, 지옥에서는 서로 자기만 먹으려고 아우성이라서 큰 젓가락으로 집은 음식이 입에 닿지 않기 때문에 다 배고픈 고통 속에서 지낸다는 옛날이야기입니다.

어느 어른 스님께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불자들의 일상적인 생활 전부가 보시’라고...

대중스님 여러분 이렇게 받기 어려운 사람 몸 받았으니 우리 모두 공부 열심히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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