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동사섭-사교반 이진 스님

가람지기 | 2009.10.05 10:28 | 조회 3536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라디오는 소음만 낼 뿐입니다.

행복하십니까? 사교반 이진입니다.

대중스님께서는 시원한 산들바람이 시속 190km의 초강풍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철근다리를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답은‘그렇다’입니다.

1940년 11월7일 미국 워싱턴 주 타코마 해협에 놓인 다리가 산들바람 때문에 어이없이 무너져버렸습니다. 타코마 다리는 그 길이가 840m로 당시 세계에서 3번째로 긴 신공법의 다리였습니다. 그런데 완공 석 달 만에‘산들바람’에 그 거대한 철 구조물이 맥없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이야기인 즉은 산들바람이 불던 오전, 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다리가 너울너울 춤을 추기를 한 시간쯤 하고는 중앙부터 부서지기 시작해서 몇 분 후 다리의 가운데 부분이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다리를 붕괴시키기에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바람에 거대한 철 구조물이 엿가락처럼 휘어 무너져 내린 사실에 토목 기술자들은 경악했습니다.

어찌된 영문일까요? 정답은 파동입니다. 양쪽 교각에 연결된 케이블에 매달려 있는 현수교였기 때문에, 바람이 불 때마다 약간의 진동이 생겼습니다. 이 진동이 다리 자체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진동과 일치해서 다리를 더 크게 진동하게 만들었고 결국 파괴되어 무너지게 했습니다. 갑자기 웬 무너진 다리 타령인가 하시겠지요?

저는 오늘 보살행의 필수요건인 동사섭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동사섭(同事攝)은 함께 일하고 생활함으로써 상대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보살행으로 이것을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이라합니다. 흔히 동사섭은 진흙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더러워질 것을 각오하고 진흙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비유로 삼습니다. 또, 세간에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중생을 교화하는 유마거사의 예를 들기도 합니다.‘법화경’ 신해품에서는 잃었던 아들과 친해지기 위해‘진주목걸이와 좋은 의복과 장신구를 벗어버리고 허름하고 때 묻은 옷으로 갈아입고, 흙과 먼지를 몸에 바르는 아버지’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동사섭이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인 것 같아 어쩐지 아직 수행 중에 있는 우리에게는 먼 일처럼 느껴집니다. 동사섭을 위해서는 원효스님처럼 길거리로 나서야하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사섭은 그리 먼 곳에 존재하는 이론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 있습니다.

아까 다리가 무너진 이유는 다리 자체의 고유 진동과 바람이 불 때 다리에 생기는 진동이 우연히 정확히 일치되는 바람에 진동이 커지고 그로 인해 다리가 무너진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변화를 원한다면 진동수를 맞추면 파괴가 일어나 개혁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과격한가요?

자, 이제 동사섭을 경험해 보겠습니다. 대중 스님 여러분, 눈을 감아 보십시오.

눈을 감고 바깥의 공기의 흐름에 감각을 맞추어보십시오. 고요하고 편안합니다. 이것이 공기가 우리에게 주는 동사섭입니다. 귀를 열어 보십시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동사섭을 들어보십시오. 이제 눈을 뜨면 빛이 주는 동사섭을 느낄 수 있습니다. 원한다면 어느 조용하고 상쾌한 곳에서 육근으로 자연의 동사섭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자연이 우리에게 행하는 동사섭 속에서 정화되고 평화를 느끼고 행복해집니다. 은행나무 잎이 주는 노란 행복, 지금 회성당 앞을 지나면 꽃이 뿜어내는 아름다운 향기의 동사섭이 나의 청정 본연을 깨웁니다. 그렇습니다, 함께하는 것이 동사섭입니다. 서로의 주파수를 맞추는 겁니다. 대중 화합도 동사섭을 통해 이룰 수 있습니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고 이해하는 것. 그들의 주파수에 맞추어보는 것. 도저히 안 되는 일인가요?

자신을 위한 동사섭도 있습니다. 자연의 주파수에 도저히 맞출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우울할 때, 너무나 화가 날 때, 너무나 슬플 때! 그럴 때는 자신의 정서나 기분을 대변할 수 있는 음악을 들으면 그 감정이 표현되어서 기분이 안정될 수 있습니다. 또는 화가 날 때,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소리를 지르는 것도 모두 자신을 위한 동사섭이 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동사섭은 주파수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이끌어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음악 듣고 혼자 명상하면서 기분을 풀기만한다면 그것은 동사섭이 아니라 오감을 즐기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수행과 공부에 힘을 실어주는 행동만이 동사섭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주파수를 정확히 알아서 적절한 방편을 쓰고 매일매일 보리심을 낸다면 그것은 자신을 위한 동사섭이 됩니다. 대중 스님의 주파수에 맞춰 소임을 살면서 보리심을 낸다면 그것은 대중스님을 위한 동사섭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주파수를 맞춰 훈습된 습기를 청정하게 하면서 보리심을 낸다면 그것은 승가를 위한 동사섭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동사섭하고 남을 위해서 동사섭 하니까 이것은 이로운 일이며, 베푸는 일이며, 서로 아름다운 말을 나눌 수 있는 사섭법의 행복한 행입니다.

승가에 들어와서 가장 복된 일은 미소 한 번 짓는 것만으로도 동사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을에서는 아무리 미소 지어도 그저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할 뿐, 보리심을 내게는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수행 공동체인 승가에서는 미소 한 번으로도, 여법하게 걷는 걸음 하나로도, 법당에서 절 한 번 정성스럽게 하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보리심을 내게 할 수 있으니 모든 것이 동사섭이 됩니다. 둘이 아니란 뜻의‘불이문’안에 사는 우리는 나와 남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모두를 위해 동사섭하는 운문사 가족입니다.

유마경 문수사리 문질품에 나오는 말을 끝으로 이제 그만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이 세상에 어리석음이 남아 있는 한 그리고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제 아픔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모든 중생들에게 아픔이 남아 있는 한 제 아픔 역시 앞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대중스님 여러분, 동사섭 여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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