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만족과 행복을 아는 삶-화엄반 진언스님

가람지기 | 2009.11.20 19:36 | 조회 3213

만족하며 행복하게 사는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나는 즐거운 삶을 향유하며 살 줄 아는 삶이고 싶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뜨거운 여름이 어느새 지난 시간 속에 자리합니다. 얼마전까지 무더웠던 여름이 낯설게 느껴질 만큼, 요즘 날씨는 그야말로 ‘높고 푸른 하늘, 황금빛 태양’이어야 하는데, 계속 비가 내리며 ‘겨울아 어서 오너라.’하고 재촉하는 것 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운문의 풍요로운 가을을 지난 시간보다 더 성숙해진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은 화엄반 진언입니다.

 

하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쯤, 빨래를 걷어서 각도 맞춰 정리를 합니다. 그리고 서랍장을 열어봅니다. 왜 이렇게 꽉 차 있는 걸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그냥 멍~하니 서랍턱에 손을 걸친 채, 속의 물건들을 쳐다봅니다. 나름, 보통 사람들보다 물건이나, 그 외의 살림들을 잘 마련하지 않는 편인데도, 뭐가 이렇게 많은 건지... 맘에 들지 않아서 이것 저것 치워보기도 하지만, 답답함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는 한평생 절집에서 노스님들과 사숙님들을 비롯한 많은 스님들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부족한 것도 없었고, 필요한 만큼만 필요로 하며 사는, 그런 행을 자연스럽게 익혀왔습니다. 하지만 불편함이 전혀 없는 나의 일상에서, 복잡하게 섞여있는 살림들을 보면, 왠지 모를 찌뿌둥한 불만감이 스물거리며 내 안에 자리합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계절마다 바꿔 입을 옷이 있고, 여러 켤레의 신발도 갖춰 놓으며, 먹을거리도 풍요롭고, 대문 밖만 나서면 언제든 가진 돈으로 뭐든 해결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불과 몇 년 전, 핸드폰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이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살기 좋은 세상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손바닥만한 그 작은 기계로 전화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 TV, 음악을 듣고 사진도 찍습니다. 그야말로 21세기 첨단 기술 속에서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애나 어른이나 핸드폰이 생필품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차역에서 은사스님께 언제쯤 도착한다고 전화 드리려고 공중전화박스로 가 보면 신기하게도 군인들과 스님들 밖에 없는 광경이 참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것들을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가요?그다지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 마치 우리의 방학이 조금이라도 더 늘어나면 세상을 다 얻은 듯이 기뻐하다가도,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면 신심에 피로가 쌓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최근에 어떤 칼럼에서 초등학생을 상대로 잘 사는 기준을 물어보았더니, 최소한 10억대의 재산이 필요하다고 한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초딩이 억소리를 합니다. 즉 행복을 물질적 풍요로움과 결부시켜 생각한다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욕심이 한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한정 없는 욕심을 다 채우려고 하는 데에 행복의 기준이 좌우되고 늘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나 무소유가 아니라, 만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행복은 분수를 알고 만족을 느끼는 데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수연부작(隨緣不作)’ 즉 인연에 따라서 조작 없이, 무리수를 쓰지 않고 자기 능력에 충실하고 현명하게 사는 삶. 지혜로워야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임제록에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합니다. 이렇게 어디에 있든 자기 있는 곳에서 주인이 되라고 하신 뜻은 한없이 깊고 넓겠지만, 있는 그대로 가볍게 생각해 볼 수도 있는 이 게송이야말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잊지 말아야 할 구절임에 틀림없습니다.

타인이 하는 일에 끌려 다니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자신의 본심으로 주체자가 되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다 만족해하며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치문 봄방학 때 은사스님과 함께 한양대부속병원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두리번거리며 대학생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을 놓고 있었나 봅니다. 어렸을 적에도 대학생들이 책을 옆에 끼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멋있고 지적으로 보이던지, ‘나도 대학가면 저러고 다녀야지.’라고 했었는데...

 

스님이 갑자기 저한테 물어보십니다. “왜, 쟤들 부럽니?”

 

그 말에 놀라서 얼른 정신을 차려 앞만 보고 걸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나도 나름 대학생이잖아요. 뭐, 책을 끼고 다니는 대신 리어카를 끌고 다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모습이 훨씬 더 멋있고 좋은 것 같아요.”

말씀을 드리고보니, 기분 좋게 으쓱해집니다. 설사 지금 다시 생각해 본다 한들, 아무렴 그들을 부러워할까보냐...

 

그리고 그날 이후 느끼건대, 여느 스타일보다 우월하게 멋진 패션은 역시, 승복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떠한 신체적 결점도 다 커버되는 승복의 위력이란!

 

상대적이면서 주관적인 행복이란 것은, 이미 우리 손 안에 가지고 있고,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현실을 어떤 자세로 대하느냐로 결정이 날 것입니다.

 

서랍 속 저의 물건들을 바라보니, 편안함보다는 자꾸 불편함이 앞서는 것은, 저 또한 채우지 못한 욕심들로 제 마음의 주체자가 되지 못하고, 이런 저런 불만들을 가슴 속에 담고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루 동안 내 맘에 들지 않아서, 내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불평을 얘기 했더라 생각해 보니, 자꾸만 고개가 숙여집니다.

 

제 삶의 주체자가 된다는 것은, 내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은 것처럼 매 순간 순간, 만족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제일 값진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 그 마음을 나누고, 서로 느끼는 것이 평범하지만 가장 큰 행복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지금 이 순간, 어두운 밤하늘 밝은 달처럼 대중 스님들의 마음 속에도 여유로움과 따뜻한 미소가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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