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석굴암 - 진관스님

가람지기 | 2010.04.13 16:21 | 조회 3294

국보 제24호, 경주시 토함산 동쪽에 위치한 세계문화유산.
대중스님 여러분 어느 정도 짐작하시겠습니까?
네..제가 오늘 들려 드릴 법문은 석굴암에 관해서입니다.

석굴암의 유래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라 묘량리에 가난하게 살던 김대성이 갑자기 죽은 후, 국상인 김문량의 꿈에 한 동자가 나타나 머리를 조아리며 “저는 모량리에 사는 김대성이라는 아이입니다. 이제 국상내외를 부모로 삼아 태어나고자 하오니, 어여삐 여기시어 받아주소서”하는 꿈을 꿉니다. 국상이 꿈이 하도 생생하고 신기하여 곧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니 과연 모량리 경조의 집에서 대성의 장례가 준비되고 있는지라 국상은 돈과 쌀을 보내 장례를 치르고 그 어머니 경조가 생활할 수 있도록 논과 밭을 줍니다. 그 뒤 국상의 부인이 아이를 낳게 됩니다. 태어난 아기는 왼쪽 손을 꼭 쥔채 펴지 않자 7일이 지나 경조여인을 데리고 와서 아이를 보이자, 아기가 그토록 쥐고있던 주먹을 펼치니 그 손안에 大成(대성)이라고 쓴 금간자가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탄식합니다. 대성은 어려서부터 총망해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며 전생의 어머니와 현생의 부모집을 왕래하면서 효자로 명망이 높았고 자라서는 관직에 올라 나라에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하루는 대성이 토함산에 올라 곰 한 마리를 사냥하게 되는데 그날 꿈속에 곰이 나타나 자신은 전생의 대성을 사모한 모량리의 부자 복안의 딸 곰녀이며, 그때 대성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목을 메어 죽었는데 이생에 또다시 나를 활로 죽이니 원수가 됨을 한탄하며 대성을 괴롭히려 합니다. 이에 대성은 크게 뉘우쳤고, 그 뒤부터는 사냥을 하지 않았고 오직 불법에 뜻을 두어 크게 자비심을 일으켰으며, 그 곰을 위해 장수사(長壽寺)라는 절을 지어 혼을 달래 줍니다. 이렇게 윤회와 인과응보의 철칙을 체험한 대성은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축조하게 됩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불국사를 대대적으로 증수할 때 세워져 신라 혜공왕(774년)에 완공됩니다. 건립 당시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석굴’,‘조가절’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후 석굴암(石窟庵)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석굴암은 토함산 중턱의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습니다.

 석굴암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입니다. 석불을 장차 조각하고자 큰 돌을 다듬어 감개를 만들때 갑자기 돌이 세조각으로 갈라져서 분통이 터져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 천신이 내려와 만들어 놓고 갔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軀)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습니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2구, 나한상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습니다.

특히 주실내에 봉안되어 있는 본존불 석가여래불은 연화문이 새겨진 대좌위에 고요하게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동해를 향해 앉아 있으며, 가늘게 뜬 눈, 온화한 눈썹, 미간에 서려있는 슬기로움, 금방이라도 말할 듯한 입과 코, 길게 늘어진 귀,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는 생동감이 넘치며, 손모양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왼손은 선정인을 하고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등 모든 것이 내면에 깊은 숭고한 마음을 간직하도록 조성된 것으로 세계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미를 대표한 신라시대의 최고 걸작으로 그 조명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유산인 것입니다.

일제 때 3차에 걸친 중수해체와 조립, 무분별한 시멘트 보수로 석굴안의 누수와 습기, 이끼 등의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석굴암 보존상의 큰 어려움으로 남아있으며, 많은 학자와 과학자들의 진지한 논의는 석굴암의 전실과 광창의 존재여부, 천장의 구조등에 관한 많은 수수께끼는 하나씩 베일을 벗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성보물이나 문화재 등에 대한 훼손이 비일비재 하나 여러 학자들과 문화재청의 노력으로 보수 유지되거나 환원되며, 성보사찰들의 보존 노력도 점점 구축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너무도 미비한 상태로 이루어지는 실정은 저희들이 앞으로 지키고 본존해야할 몫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관광이나 즐김의 목적이 아닌 소중히 지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할 유산으로서의 정체성을 대중스님들께서도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봄을 알리는 꽂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이 좋은 봄날, 대중스님들께서는 어떤 봄꽃을 피우시겠습니까?..성불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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