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다 내 못난 탓입니다 - 도일스님

가람지기 | 2008.12.26 11:20 | 조회 3187

늦은 저녁, 졸린 눈으로 <節要> 보충수업을 하고 있던 중, 강사스님의 좋은 글귀니까 표시를 해두라는 말씀이 저의 耳根을 스쳤습니다.


조계조사가 말씀하시길

만약 진실로 도를 닦는 사람은 세간의 허물을 보지 않고

항상 스스로 자기의 허물을 보아야지만 道와 곧 상당하거니와

만약 타인의 허물을 보면 스스로 남의 잘못된 점을 보고

도리어 자기수행을 도와야 한다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길

만약 참된 공덕을 닦는 사람은 마음이 곧 경만하지 않아서

널리 공경을 행하지만 덕이 없는 사람은 나만 스스로 높다고 여겨서

마음으로 항상 다른 사람을 업신여긴다고 하셨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참으로 움직이지 않는 자는 일체 사람을 볼 때에

일체 사람들의 허물과 일체 선악시비를 보지 않나니

곧 이것이 성품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라.

迷한 사람은 스스로 몸은 비록 움직이지 않으나,

입만 열면 일체 사람들의 시비를 말하나니

道와 더불어 어기고 등짐이로다.


안녕하십니까? 사집반 도일입니다.

예전 당나라때 배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쌍둥이로 등이 맞붙은 기형아로 태어나서 부모가 칼로 등을 갈라 약을 바르고 치료해서 키웠는데 살이 많이 붙은 아이는 형으로 배도라 하고 적게 붙은 아이는 동생으로 배탁이라 하였습니다.

배도는 장성한 후 배휴라 불려졌고,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외삼촌한테 몸을 의탁하고 살았는데 동생 탁은 어디론지 혼자 떠나 소식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일행선사라는 스님이 오셔서 말씀을 하시는데 ‘니 얼굴이 보기는 좋아 뵈는데 얼마나 운명이 나쁜지 니만 평생 고생하고 말 것이 아니라 니 이웃까지 다 못살게 된다.’하셨습니다.

선사가 돌아간 뒤 배휴는 만류하는 외삼촌을 뿌리치고 옆 사람에게 피해를 안 주려고 저 깊은 산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 곳에서 생활하면서 자기반성을 하니 처음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반반이었습니다.

여기서 공부해서 착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무를 두 개 깎아서 좋은 일하면 오른쪽 나무에 표를 하고 나쁜 일을 했다는 생각이들 땐 왼쪽나무에 점을 찍어 표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착한 일 밖에 한 것이 없다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생각이 모자라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쁜 일이지,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무를 새것으로 바꿔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가면 좋은 쪽의 점수가 올라갑니다. 다시 지나간 일을 생각해 보니 좋은 일이라고 한 것이 전부 다 나쁜 짓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20년 동안 여러 번 반복하다보니 나이 40이 되어 자기가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늘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공부 덕에 나중에 당나라에서 이름을 드날린 유명한 정승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입문한 공부도 이와 같아서 외부세계로 치닫는 마음을 자주 안으로 거두어 들여서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이 마음이란 놈을 지켜보면 처음에는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새벽3시에 잠에서 막 깨어날 때쯤, 무의식이 흘러가는 생각들을 보고서야 아, 내가 전날 또는 며칠 전 어떤 마음을 냈었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때 흘러가는 무의식들은 전날 했던 나쁜 마음, 즉 탐심, 성냄, 어리석음이란 3독심이 대부분입니다. 잘했던 일들은 기억에 강하게 각인 되지도 않으며 오래가지도 않습니다.


마음을 봐주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시간에 비례해서 흘러가는 마음속에서 바로 그 순간 자신의 허물 즉, 불선한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마음을 한 층 한 층 더더욱 깊이 들어가면 그곳엔 두려움과 불안, 초조함, 악의, 자만, 잘난체하는 마음, 나를 위한 이기적인 선의 등등의 부정적인 마음들이 있음을 압니다.

결국 드러나는 마음이 사실은 선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가짜임을 봅니다. 그러면 배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도 나무에 새긴 표시들을 미련 없이 다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 마음이란 놈한테 정말 잘 속아 넘어가니까요

소위 말해서 업풍이 불어올 때 자신의 진면목을 여과 없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집니다. 잠깐 일시적으로 가라 앉아 있던 모든 탐진치들이 바깥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니까요. 막상 그 순간들이 오면 나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서 일어나는 번뇌들에 초연하기가 힘듭니다.

그 극단적인 상황에 서면 자기방어 본능이 생겨서 문제의 원인을 외부나 상대방에게 돌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번뇌의 파도가 잦아질 때 쯤 늘 한 발짝 늦게 오지만 문제의 뿌리는 결국 내 마음안의 탐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아주 사소한 말다툼조차도 사실은 그렇습니다.


제가 잠깐 어떤 수행처에 있을 때 일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함께 수행하던 젊은 여자가 있었는데 한 달 동안 자신의 마음을 보더니, 며칠을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서 그런가했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분의 마음이 진정이 되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드러난 마음 밑에 다른 마음, 그 밑에 마음, 또 그 밑에 깔린 마음들을 보다보니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두렵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정말 자신이 부끄러워서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구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여자분은 마음을 아주 잘 볼 줄 아는 수행자였던 것입니다. 아마 배휴의 마음도 그랬을 거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잘잘못을 열심히 보다보면 사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나무라거나 마음을 일으킬 여유가 없어집니다. 한순간 마음을 일으켰다 해도 일어난 내 마음의 탐진치를 바라보고 반성할 뿐 더 이상 바깥의 대상으로 문제를 돌리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노력과 정진이 부족할 뿐입니다.

승찬스님의 신심명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습니다.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거니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자못 짐작하기 때문이로다.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


대중스님 여러분,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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