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수행의 디딤돌, 보시 - 보전스님

가람지기 | 2009.03.25 12:57 | 조회 3294

봄 가득한 겨울의 끝에서 대중스님들은 어떤 수행중이십니까?

저는 요사이 수행의 방편으로 자주 작심을 하곤 합니다. 마음에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도 자꾸 훈련하면, 한여름 뙤약볕에서 매일 고추 따는 울력을 하면서도 쓰러지지 않아 서로의 강인해진 체력을 원망했던 것처럼 강인해진다고 합니다. 그렇듯 수행에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집 첫 구사론수업은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 마당이었습니다. 강사스님께서 대웅전 벽화에 그려진 육바라밀을 설명해주셨던 추억은 제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두 아이마저 다 주고도 흔들림 없이 여여하게 정진하던 수행자의 모습은 두고두고 저에게 육바라밀의 중요성을 각인시켜주었습니다.


오늘 제 법문의 주제는 보시이며, 여기 전설 같은 하나의 이야기로 제게 주어진 시간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신라 제38대 원성왕 때 있었던 일입니다. 임금님은 당시 유명한 황룡사의 지해(智海)법사를 대궐로 초청해 화엄경 법회를 개설하였습니다. 법회는 장장 50회나 계속된 아주 긴 법회였는데, 그때 묘정이라는 사미 하나가 지해스님을 시봉하느라 대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묘정사미는 공양이 끝나면 발우를 금광정(金光井)이라고 불리는 아주 맑은 우물에 가서 씻었습니다. 그런데 대궐에 들어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커다란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위에 떠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묘정은 일부러 밥을 조금씩 남겨서 자라에게 주었더니 자라는 사미가 오는 소리가 나면 우물 위에 떠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를 50일 가량이 지나 법회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사미는 자라에게 장난삼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라야, 조금 있으면 나는 대궐을 떠난단다. 내가 그 동안 널 위해 밥을 주었는데 너는 나에게 줄게 없니?”

다음 날, 우물에 가서보니 자라가 무엇인가를 입에 물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보니 예쁜 구슬이었습니다. 사미는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구슬이 마음에 들어 아주 기뻤습니다. 그래서 누가 볼세라 그것을 허리춤 깊숙이 간직했습니다. 그 후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연히 묘정은 왕의 눈에 뜨이게 되었고, 내전으로 들어가 왕의 곁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라의 사신을 따라 당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당나라 황제와 모든 대신들도 묘정을 보고는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한 관상쟁이가 황제에게 아뢰었습니다.

“황제폐하, 이 사미의 관상을 보건대 사람들에게 별로 존경을 받을 만한 상호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토록 많은 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걸 보니 반드시 무슨 물건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이 말에 황제는 사람을 시켜 사미의 온 몸을 뒤져보게 하였더니 과연 묘정의 허리춤 속에서 구슬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얼마 전에 잃어버린 황제의 여의주였습니다. 묘정이 그 자초지정을 이야기하였으나, 자기의 것이 분명했던 황제는 구슬을 빼앗았습니다. 구슬을 빼앗긴 묘정은 그전처럼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사미가 되어 낮선 이국땅에서 방황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보시하는 것처럼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모두들 ‘생활 속에 수행'을 찾지만, 막상 알면서도 실천이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보시는 생활 속에 불교를 실천할 수 있는 수행입니다.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합니다. 지혜를 증득했을 때 자비가 일어나고, 두가지의 수행이 보시를 불러옵니다. 계율이나 선정, 지혜 등이 다 중요하지만, 그것이 보시의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면, 틀린 것이라 하였습니다.

옛말에 “어떤 이의 수행을 점검하려면, 그의 보시 정신을 살피면 된다. 도력이 높다는 명성만 있고, 보시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가짜이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묘정사미의 보시는 처음에는 순수한 것이었지만, 장난삼아 던진 말이 상(相)이 있는 보시가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의 윤회 속에 또 다른 윤회’를 하게 된 이야기로,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시는 다만 복 짓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상을 타파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근본이 되는 수행인 것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했다는 생각이 모두 비워진 보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주상보시'이며 이런 수행이 '보시바라밀'인 것입니다.

<대지도론> 제14에 보면 보시의 유형으로, 재물을 보시하는 재시와 물질이 없더라도 도력이 있으면 깨우침을 줄 수 있는 법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돈과 도력이 없을 때는 어떻게 보시를 실천 수행해야 할까요? 다행히도 부처님께서는 저와 같은 낮은 근기의 제자들을 위해 자상하게도 무외시를 설해 주셨습니다. 무외시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없게 할 수 있는 보시입니다. 흔히 무재칠시(無財七施)라고도 하는데,

첫째 부드럽고 편안한 눈빛,

둘째 자비롭고 미소 띤 얼굴,

셋째 공손하고 아름다운 말,

넷째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

다섯째 착하고 어진 마음,

여섯째 다른 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일곱째 사람을 방에 재워주는 것..등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가까이에 실천 할 수 있는 보시들이 많으면서도 얼마나 옹색하게 살고 있는지, 법문을 준비하면서 부끄러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저는 지금, 큰 보시를 향한 원을 세우되, 먼 훗날로만 미루지 않을 것이며, 지금 작은 보시부터 쌓기 시작할 것을 발원합니다.

성열스님의 ‘고따마 붓다’에서 발췌한 부처님의 ‘과거현재인과경’의 글을 끝으로 저의 법문을 마칠까 합니다.

“보시하는 사람은 탐욕을 끊게 되고, 인욕忍辱하는 사람은 분노를 떠나며, 선행을 쌓는 사람은 어리석음을 여의게 되리라. 이 세 가지를 갖추어 실천하면 빨리 열반에 이르게 되리니, 가난하여 남들처럼 보시할 수 없더라도 다른 사람이 보시하는 것을 보고 칭찬하고 기뻐하면 그 복은 보시하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을지어다.”


항상 깨어있는 수행자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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