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마음을 찾아서 -반주스님-

가람지기 | 2008.09.21 12:45 | 조회 2840

마음을 찾아서......

두 철을 배웠던 치문에는 주옥같은 글귀가 많아 수업시간에 밑줄을 빡빡쳤는데 그 구절들만 이해해도 진리를 아는 데나 수행의 지침으로서 모자람이 없다고 합니다. 한 구절을 말씀드리면 “心如工畵師하야 造種種五陰하나니 一切世間中이 無不從心造라. 如心不亦爾하며 如佛衆生緣하야 心不及衆生이 是三無差別이니라”

마음은 뛰어난 화가와 같아 각종 5음을 짓나니 일체 세간 중에마음을 쫓아 지어지지 않는 것이 없음이라. 마음처럼 부처님이 또한 그러하며 부처님과 같이 중생또한 그러하여 마음, 부처,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음이라.

개학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저의 절에 행자님 한 분이 들어왔습니다. 들어왔다기 보다 저의 절에 기도를 하러 왔었는데 기도를 하도 열심히 하는데다 인사성이 밝아 은사스님에게 픽업되었지요. 며칠 있다가 저 개학한 후에 깎으면 좀 좋았겠습니까? 하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그 날, 머리도 깎아주고 옷도 입히고 입던 옷도 태우고 법당에 인사도 올리게 하는 등 저는 엄청 바빴습니다. 또 개학을 앞두고 법문 준비로 마음이 무겁고 바빴던 저였지만 스님의 당부에 따라 행자님을 봐주게 되었습니다.

이 행자님은 행건 매는 거라든지, 차수든 절이든 한 번 가르치면 가르친대로 한 번도 놓치는 법이 없었고, 하라는 건 반드시 하고 하지 말라는 건 절대 절대 안하는, 저와는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아침까지도 차수가 안된다고 걱정을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저와 같은 과를 원한 건 절대로 아니지만 제 사제가 될 행자님은 수승하되 저보다는 쬐끔 못하길 바랬지요.

아! 제 속을 모르시는지 알고도 모르는 척 하시는지 은사스님은 대놓고 재목감이라고 흐뭇해하시면서 제가 기도하는 낮 2시, 밤 12시 말고도 조석, 사시예불까지 하루 5분정근에다 틈틈이 도량청소, 목탁, 염불외우기까지 강행군을 시켰습니다.

밤에 똑같이 기도를 마치고 돌아와 행자님은 다시 바로 새벽 예불로 직행했지요. 행자님이 절을 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동안 저는 무척 피곤했었음에도 엎치락 뒤치락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낮엔 은사스님 방에서 한나절 목탁을 두드려 제 속을 뒤집더니 야심한 시간엔 관세음보살로 저를 또 잠 못이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고 여러갈래 마음이 일었다 사라졌는데, 그 내용은 줄줄이지만 시간관계상 뚝 잘랐습니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시기, 질투심이었죠.

나이도 저보다 훨씬 어리고, 끈기도, 노력하는 것도, 수순하는 것도 아무리 따져봐도 제가 행자님보다 나은 건 목청 하나 크다는 것 그것 뿐이었습니다. 행자님이 저보다 낫다고 생각하니 못견디게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괴로웠던 건 행자님 잘난 꼴을 제가 보아넘기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지요. 누구나 자신의 치부는 가리고싶듯이 저또한 내 자신이 밴댕이 속이라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행자님 한 분의 출현으로 잠 못 이룰만큼 동요하는 나의 마음을 바라보며 꼬치꼬치 나 스스로에게 따져들어갔습니다. 나는 나고 행자님은 행자님이니데 내가 왜 이토록 전전긍긍하는지에 대해서...... 따지고 보면 그토록 많은 번뇌를 가져다 준 행자님은 제게 있어서 한낱 바깥경계요, 나의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일 뿐입니다.

만약 제가 남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 남보다 우월하고자하는 마음, 그래서 남과 나를 비교하고 경쟁하고 부정하는 그런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행자님 아니라 그 누구때문이라도 나의 마음은 늘 파도를 치며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내겠지요.

“그래 피하지 말아야지. 넘어진 그 자리에서 딛고 일어서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막내로 자라 받는 것에 익숙하고 주는 것, 품는 것이 잘 안되는 저에게 넘어진 그 자리는 사제가 된 행자님을 아껴주고 품어주는 것일 겁니다.

“그래 품어야지. 품어낼 수 있도록 나는 비워야지!”

생각이 이와같이 정리되어서야 비로소 저는 편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지요.

행자님 얘기를 드렸듯이 일상은 늘 이런 식인 것 같습니다. 경계를 당하여 수없이 일었다 사라지고 지지고 볶는 이러한 마음들은 다름아닌 번뇌, 망상입니다. 탐진치로 가득찬 중생의 마음이지요. 그런데 ‘心不及衆生이 是三無差別’이라고 중생과 부처는 다름이 없다고 합니다. 번뇌, 망상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것이 중생이요, 버리고 떠난 경계가 부처라는 것이죠. 그리고 부처가 되고 중생이 되는 것은 바로 일념. 바로 우리 자신의 한 생각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또 부처님의 경계 즉 ‘諸佛의 解脫은 當依衆生心行中’이라. 모든 부처님의 해탈은 바로 번뇌, 망상, 분별심으로 가득한 중생심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마음을 관하는 것도 관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와같은 이유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내 것이라는 집착 속에 에고로 똘똘 뭉친 마음. 탐진치로 가득찬 자신의 마음을 보는 건 쉽지않거니와 보고싶지도 않지만 일단 알았을진댄, 눈 감을 수 없기에 마음을 바로쓰는 用心, 마음을 다스리는 癡心, 행을 바르게 하는 修行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저 또한 온갖 번뇌 망상에 끄달려 밤을 지새는 중생이라 할지라도 이미 머리 깎고 출가한 수행자로서 저의 관심은 오로지 마음 닦는데 있고, 나아가 부처를 이루는데 있습니다. 매번 경계를 당함에 있어 과정상 감정에 끄달려 제 속을 볶아채고, 괴로워해도 결론은 버킹검이라고, 탐심, 진심, 치심에 가득한 중생심을 버리고 바른 마음과 행으로 회향하는데 있습니다. 나아가 그러한 마음마져 버려 바른 마음, 바른 행이라는 생각조차도 없는 경지, 그 경지가 어떤 것인지 지금의 저로선 알 수 없지만, 찰나 찰나 일어났다 사라지는 마음을 거듭거듭 보고 털어내고 한 생각을 바로 돌이키는 노력이야말로 공적한 본래 마음자리를 찾아가는 지름길 아니겠는가 확신하며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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