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나라는 상이 무너진 곳에 - 명원스님

가람지기 | 2008.11.15 13:42 | 조회 3271

안녕하십니까? 사집반 명원입니다.


큰스님께서 주장자로 법상을 치는 순간, 온 대중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하게 평정심을 드러내는 이유는 그 순간, “나” 라는 생각이 모두 사라져 한마음이 되는 까닭은 아닐까요?


초발심자경문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人我相 崩處에 無爲道 自成하리라.

나라는 상이 무너진 곳에 함이 없는 도는 저절로 이루어지리라.


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다고 믿어 일어나는 모든 관념들을 비워내고, 궁극에는 나를 비웠다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은 상태가 되면 도는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옛 조사 스님들은 말씀하셨습니다.


치문 겨울, 그 날도 몹시 피곤한 날 이었습니다.

후원소임을 마치는 마지막 날, 다음 파트 소임자가 인수인계를 받으러 왔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 스님은 중공양주를 몇 번 살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자꾸 이런 저런 것들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귀찮은 생각이 들었고, 강한 말투로 취조하듯 물어 오는 그 스님이 싫었습니다. 저는 퉁명스럽게 대답 했고, 급기야 그 스님은 내게. 도대체 인수인계를 왜 그렇게 쌀쌀맞게 해 주느냐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습니다. 내가 피곤하다는 핑계로 감정 조절을 못했구나!! 생각 하면서도 제가 쌀쌀맞게 이야기 한다는 그 말을 인정하기 싫어서, 강한 말투로 물어 오던 그 스님 때문에 제 말투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합리화를 시키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불편한 마음을 어찌하지 못 한 채 얼굴이 퉁퉁 불어 있었던지 함께 일하던 도반스님이 얼굴이 왜 그러냐면서 묻습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그 도반스님이 말하길 “스님이 좀 차갑지요.” 했습니다. 그때서야 겨우 저는 제 자신을 인정했고, 인정하고 나니 그 도반 스님에게 미안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에겐 다반사입니다.


잘 지내다가도 주기적으로 한 번씩 오는 도반스님들과의 부딪침.

그 때마다 몸은 피곤해 있고, 유난히 생각이 많은 날이 많습니다.

그래 나의 이기심과 아만을 눌러 주기 위해서 도반스님들이 쳐 주는구나 생각을 하면서도 미리 알아차려 지혜롭게 행동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도대체 이 근본 이유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고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게는 이미 했다는 상이 일어나 있었습니다.

일을 했으면 몸이 피곤한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라고 반문을 하겠지만 그건 우리의 오래된 습관에서 오는 고정관념입니다.


몸과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몸이 피곤해서 그렇지 뭐” 하면서 몸이 마음을 움직인다고 상황을 합리화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밖의 경계를 살피는 데만 익숙해 져 있다 보니 마음의 움직임을 들여다 볼 여유가 우리에겐 부족합니다.

내가 했다는 상이 이미 일어나 있었기 때문에 저는 잘못을 인정하기 싫었고,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저의 본 모습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이성으로는 그래 내 잘못이야. 하면서도 감정의 흐름은 밖의 경계를 향해 있었습니다.

항상 이렇습니다. 속고, 속고, 또 속고.......

다만, 속는 바깥 경계가 조금 씩 다를 뿐 안의 경계는 항상 마음속에 “나” 라는 한 생각이 근본 원인입니다.

우리의 머리는 이 근본 원인을 너무나도 잘 이해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아는 것이 아니며,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감정이 부딪쳐서 소리가 나는 생활이 이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투고 부딪치는 이유는 상대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내 얼굴임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나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을 때 또, 상대의 행동이나 모습을 보고 한 생각이 일어 날 때에 우리는 한 걸음 쉬었다가 나를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진 않은지”

백발백중 “나” 라는 한 생각이 이미 일어나 있는 상태 일 것입니다.

다만, 다른 모양으로 포장지만 달리 했을 뿐 그 뿌리는 하나입니다.

이 뿌리를 뽑기에는 대중이라는 이 무리가 참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대중스님들은 한시도 안테나를 내리고 있는 날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이기심과 아만이 일어났다 싶으면 언제 알았는지 바로 쳐 줍니다.

그 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나를 내려놓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족한 나를 보고 웃어주는 그 얼굴은 참 고맙고, 업으로 가득 차 있는 못난 내 얼굴과 모습을 보고, 채찍질 해 주는 그 몸짓을 더욱 감사하게 생각 합니다.


한 때는 말 많고 시끄러운 이곳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공양물이나 축내면서 또 다른 업만 짓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바보 같은 고민을 하면서, 과연 지금 여기에 깨달음의 길이 어디에 있냐고? 소리쳐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깨달음의 길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나라는 생각을 내리고, 대중에게 수순하는 그 순간에, “잘못했습니다.”라고 진심으로 참회 하는 그 순간에 있습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 “나” 라는 상을 비워내는 그 순간에 깨달음의 길은 있습니다.


앞서간 선지식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야지“ 비로소 근본자리를 볼 수 있고, 그제서야 마음공부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수행의 길은 멀기도 멉니다.

여기에서 보다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곳에서 인내하는 법을 익히지 않는다면, 지금 이 곳에서 나를 낮추어야 되는 이유를 뼈저리게 느끼지 못한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수행의 바탕이 되는 그릇을 만들 수 없습니다.

낙엽은 떨어지고, 몸의 나이는 점점 들어만 갑니다.

50이 넘어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외로움을 감당해 내기 힘들다고 먼저 깨달은 어느 선지식은 말합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 위에 서 있는 대중 스님 여러분,

한 순간도 방심 하지 말고 애쓰고 또 애쓰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 먼저 성불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정법을 만나,

바르고 지혜롭게 수행정진 할 수 있도록 발원합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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