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不二 - 태범스님

가람지기 | 2008.11.16 11:21 | 조회 3256


안녕하십니까? 부처님 가피력에 저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포들이 감사함으로 충만해서 항상 행복하고 싶은 사집반 태범입니다.

처음 불문에 들어올 땐 크나큰 기대감과 부푼 원력을 가지고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말씀을 따르려 부단히도 마음자리를 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허나, 지금의 저를 돌아보면 그다지 달라진 모습은 없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암담함에 가끔씩 제 자신에게 이렇게 묻곤 합니다.

“너는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가? 무덤을 향해서인가 아니면 깨달음의 길을 향해서인가?

대중스님들은 지금 어디를 향해서 가고 계십니까?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목탁소리에 우리의 일상생활은 시작 됩니다. 그때 제일 먼저 지나가는 문이 不二門입니다. 不二門은 “크나큰 진리는 오직 하나이고 둘이 아니며, 만남과 이별이 둘이 아니며, 시작과 끝이 둘이 아니며,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닌 문, 이문에 들어서면 나와 부처가 하나 되는 세계를 만들 수 있으며, 둘이 아닌 이치를 깨칠 수 있는 문”이라고합니다

저에겐 좀 이상한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음식물을 쓰레기통에 버릴 때 마다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보는 것입니다. 출가하기 전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밤 늦게까지 책을 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었습니다. 그날 라 왜 그리도 배는 고픈지, 빨리 집에 가서 요기를 해야겠다며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주 그윽한, 지금까지 맡아보지 못했던 근사한 음식 냄새가 저를 자극하는 것이었습니다. 전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몇 개의 음식점은 문을 닫은 상태였고, 좀 떨어진 아파트 몇 집만이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전 자신도 모르게 그 향기를 좇아 발걸음은 빨라지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 다다랐을 때 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 눈을 의심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엔 음식물 쓰레기 수거차량 한 대만이 덩그러니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전 그 냄새의 출처가 그 차량인지 알고 싶었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오물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무엇엔가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 썩어서 부패한 냄새가 아무리 배가 고프기로, 이토록 저의 모든 감각을 자극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반사적으로 코를 틀어막았습니다.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지며 구역질이 올라왔습니다. 냄새 나는 곳에서 멀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발은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고, 집에 다다른 후에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상쾌한 공기의 맛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배고픔도 잊은 채 이부자리에 누웠습니다. 좀 전의 일이 너무도 우습고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습니다. 무엇이 날 그렇게 분별심을 내게 했을까? 어리석게도 좀 전까지만 해도 가장 훌륭한 냄새였는데 그 실상을 보니 그 냄새는 악취가 되어 저의 의식과 행동을 변화시켰으니 말입니다. 그때 떠오른 인물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원효대사였습니다. ‘道友인 의상스님과 당에 유학하기를 꾀하고 입당의 길에 올랐다가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한 생각이 번개처럼 번쩍하는 찰나에 깨달음을 얻었다’ 는 일화가 생각났습니다. 그렇다면, 원효대사가 진정으로 깨우친 것이 무엇이며, 그것으로 자유로워졌다면, 그 길이 진정한 삶이며 참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삭발염의 했고, 이곳 운문사 대 도량에 와서 공부하게 되는 복도 얻었습니다.

원효대사는 자신의 깨달음을 기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 일체법은 다 마음으로 좇아 일어나며 망념에서 생긴 것이다. 온갖 분별은 곧 自心을 분별함이니 세간의 온갖 분별은 곧 자심을 분별함이다 세간의 온갖 경계는 다 중생의 무명망심에 의하여 주지되나니 마치 거울 속에 비친 상은 실체가 없는 것과 같다. 다만 망심으로 있다고 분별할 뿐이다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법이 사라지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삼계가 허위하여 오직 마음으로 지은바이다. 마음을 여의면 곧 육진경계가 없다.”라고 .......

전 이러한 이치를 가슴으로 사무치며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항상 어떠한 욕망의 늪에서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제자신의 이기심과 항상 충돌하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경계에 상대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분법적인 사고를 떨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둘로 보며 항상 시비하고 분별하고 있습니다. 그 분별심에서 벗어나 오직 한마음 잘 닦아 주인공 찾는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업장의 두터움에 허우적거리며, 한편으로는 탐욕 속에 잠들어 있는 독선과 아집에서 벗어나려하니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생각입니까?

마음에는 모두 아시다시피 두 가지 의식이 있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의식과 부정적인 의식 우주와 인생의 본질을 깨닫고 나면 긍정적이고 성취적인 의식이 나온다고 합니다. 내가 부처인 것을 자각할 때 인생관도 바뀐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부정적인 의식 밉다 곱다 좋다 나쁘다는 등의 분별심입니다. 그래서 감정을 일으키고 눈만 뜨면 시비를 하게되는 것이랍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둘로 보는 마음을 돌려서 너와 내가 하나임을 자각하게 되면 저의 쓰레기 냄새 맡는 습관도 자연히 사라지고, 8만4천 부처님법이 결국엔 해탈의 문으로 연결됨을 알아서 한걸음 더 가까이 깨달음에 갈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不二란 무엇인가?에 대한 최상의 법문 유마경의 不二法問品에선 유마거사의 우뢰와 같은 침묵”을 놓고 문수보살은 “불이의 법문에 들어가는 도리이니, 거기에는 실로 문자도 없고, 말도 없으며, 마음의 움직임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참된 실제는 어떤 말로도 온전히 있는 그대로를 드러낼 수 없으며,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니 지금 현재 이 자리에서도 우리가 마음쓰는 대로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니 한 생각만 돌린다면 저 육조스님처럼 문득 깨치는 분이 나오리라 믿습니다.

대중스님 여러분 마지막으로“보적경”가섭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마음은 환상과 같아 허망한 분별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마음은 바람과 같아 멀리가고 붙잡히지 않으며 모양을 보이지 않는다.

마음은 강물과 같아 인연의 화합으로 일어난다.

마음은 번개와 같아 잠시도 머물지 않고 순간에 소멸한다.

마음은 허공과 같아 뜻밖의 연기로 더럽혀진다.”


대중스님 여러분 환절기 건강관리 잘하시고 진정한 무분별지를 떠나서 진여자성을 깨치시길 간절히 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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