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나를 찾기 위한 길 -아산스님-

가람지기 | 2008.04.06 15:47 | 조회 2910

안녕하십니까? 사집반 아산입니다.


제가 차례법문을 한다고 글을 쓰려고 하니 정말 머릿속이 한방 가득히 발 디딜 틈 없이 온갖 물건을 어질러 놓은 것처럼 복잡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글을 씀으로써 나의 생각 또한 정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살아오면서 그냥 눈뜨고 숨 쉬니까 살아있다고 느끼지‘왜 사는지’이세상은 이상해’라는 생각으로 이유 없는 허무감으로 살아내다가 아니, 번민하다가 어느 날 불교를 만나고 부처님을 만나서 출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출가한다고 하니 아는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해 주셨습니다. “니가 알고 판단하는 모든 생각은 다 틀렸다.”라고 생각하고 살면 살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제가 속가에서 똑부러지게 잘 살았다면 이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지만 그게 아니었기에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면 이번이 그 기회다-그래 한번 해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6개월 행자생활은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업장이 많으면 이 늦은 나이에 겨우 불법을 만났을까하는 생각에 내가 다 잘못되었다고 내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그래도 워낙 눈치 없고 게으른 습이 많아서 선배스님들 진심나게 하고 결국은 심한 건망증으로 쇳송을 쳐야하는데 후원에 가서 아욱을 치대고 있다가 부전소임을 보던 스님이 나를 보고는 놀라 말도 못하고 손으로만 가리키면서 기가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 금방 강원 갈 때가 되어서 입학하러 오는 그날 차를 타는 순간까지 이름표를 붙였습니다. 2년 반을 사는 동안 이름도 안 새기고 벽장 정리도 뒤죽박죽 그렇게 살았습니다. 답답했습니다. 내가 도대체 뭐하고 있나하는 자괴감도 들었습니다. 출가가 곧바로 무엇을 내손에 쥐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침예불이 왜 꼭 3시여야 하는가하는 생각은 요즘에 와서야 조금 이해가 되는 부분이고, 이렇듯 나를 바꾸는 작업은 그렇게 지리멸렬하고 햇볕이 내리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출가하고 일하면서 사는 일에 또 내 앞의 일들이 내 의지가 아닌 상황에 끌려가고 있는 것을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속이고 자신을 안주시킨 것은 아닌지 어떤 스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각마저도 의식 저 멀리 희미해지고 매일매일 매몰되어 사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녁에 떠오르는 별을 보면서 ‘오늘 하루도 또 가는구나’ 하면서 부처님 얼굴을 떠올리며 기도했습니다. ‘제발 이 길에 장애 없이 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언젠가는 강원을 마치고 소임을 살러 오신 스님이 제발 선지식을 만나게 해달라고 소임 사는 그 힘든 와중에 삼천배를 하는 것을 보고 그 간절함에 눈물이 날뻔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내 속의 몸의 의식은 일을 좋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내가 출가해서 몸을 움직여 일을 하지 않고 이론으로만 공부했다면 나는 아상만 잔뜩 높아지고 알음알이만 더해져 구제불능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부처님께 출가해서 살게 해주신데 대해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싫어도 해야 하고 몸이 아파도 심하지 않으면 참아야하고 나의 생각을 버리고 내 판단을 버리고 나를 깎아나가야 했으니까요. 쉬는 날도 하루 푹 쉬고 싶은데 산은 또 왜 그렇게 가자고 하시는지. 마음대로 빠질 수도 없어 삐걱대는 관절을 끌고 올라갑니다. 그러나 어떻게 어떻게 몸을 끌고 올라가서 그 정상에 섰을 때 ‘와~’ 온 천지가 확 터져서 산이 첩첩이 놓여있는 천하가 눈앞에 펼쳐졌을 때 그 장엄하다고 느끼는 그 느낌은 ‘우리가 성불하면 느끼는 것과 비슷할까?’하는 상상을 해보며 가기 싫어했던 마음과 이렇게 오길 잘했다고 하며 감탄하는 이 마음은 도대체 같은 마음인지 아니면 다른 마음이지 모르겠습니다.

강원에 오면서 저는 발원을 했습니다. '제발 일 잘하게 해달라고...’ 대웅전부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몸이 힘들었으나 그나마 백팔대참회를 하면서 밤새 무의식의 업의 창고를 떠돌며 다시 물들은 나의 의식을 호흡과 땀과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소리를 통해 서서히 깨웠습니다. 신선한 기운이 생기고 그 기운으로 하루를 견딜힘을 얻어 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봄철을 지나 여름철이 오면서 서서히 힘이 들고 일을 하다가 팔이 몸과 연결된 관절부위가 너무 아플 때가 있는데 정말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숨을 꿀꺽 참고 하다보면 어느 순간 안 아픈 상태가 되는데 그렇게 일을 끝내고나면 마음 안에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서서히 나의 한계를 뛰어 넘으면서 안 되면 부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나 그래도 정말 고칠 수 없는 저의 병은 출가 때부터 묵언을 생활화한라는 것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목소리도 크고 성격도 급해서 화부터 벌컥 내기도하는데 도반스님들이 몸 안에 확성기가 장치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주변에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조금 목소리가 커질라치면 옆에서 ‘빨리 확성기 끄세요.’라고 저의 주의를 환기시켜 주기도 합니다. 고민을 하다가 작년에 강사스님께서 개인기도나 진언 등을 하나씩 정해서 하라고 하신 말을 듣고 ‘정구업진언’을 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언젠가 말이 많은 사람은 ‘정구업진언’을 하고 밤에 이를 가는 사람은 ‘해원결진언’을 하면 좋아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렇게 정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침예불 때 대종 치는 동안 속으로 염해보고 누구랑 말하고 싶고 참견하고 싶어질 때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하면서 그 말하고 시은 마음을 돌리고 하였으나, 어느 순간 잊어버리고 운력할 때라도 속으로 염하면 되는데 놓치고 할 수 없이 호주머니에 염주라도 넣고 다니면 손을 넣었다가 생각날까 들고 다녀보기도 하고 발우시간 전에 앉아서 하다보면 어느 순간 졸고 있거나 망상만하고 도반들은 각종경과 진언도 잘하던데 ‘나는 왜 이럴까’ 말은 더 많아지고 어떤 때는 혼자 중얼대기도 한다하니, 이건 기도가 아니라 발악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 후회만이 가득하고 이 숙업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한탄하기를 여러 번 그렇게 기도가 흐지부지 되면서 스스로에게 실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시작을 알 수 없는 무시이래로 내안에 입력되어 있는 습관, 업은 내가 그 이유를 밝히고 참회와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없앨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업시간에 강사스님께서 정구업진언에 ‘찬탄하다’라는 뜻이 들어있다고 하시면서 ‘백번의 진언을 염해야 그 한번지은 구업을 녹일 수 있다.’라고 하니 미리 노력해서 업을 짓지 않아야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나는 알면서도 안 되는가.’가 오히려 나의 화두처럼 되어 계속 고민하다가 결국 감기도 심하게 걸리고 예전에 다쳤던 부분도 다시 아파오면서 마음에는 현애상과 퇴굴심이 서서히 머리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 몸 아픈 일에 끄달려서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사에 가서는 노스님으로부터 ‘소임 열심히 살아라.’라는 말씀만 듣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아와서는 내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해결할 겨를도 없는 상태로 후원소임과 일들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아파서 쉴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입승스님이 ‘선가귀감’을 방학 때 미리 논강시키고 암송시키기도 했지만 치문때 한자로 고전했던 시간이 후회가 되어 책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힘들어도 앉아 있으려고 하고 단 15분이 있더라도 경상을 들여서 어떤 때는 경강들이고 내는데 시간이 다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마음과 몸이 의욕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신학기가 되어 선가귀감을 배우면서‘修行之要는 但盡凡情이언정 別無聖解니라’라는 구절에서 ‘수행의 요지는 다만 범부의 생각을 없애는 것이지 따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없고 오히려 바른 법을 찾는 것이 바르지 못한 사도니라’라는 구절에서 내가 계속 무엇인가를 찾고 성불은 어떤 형태를 가져서 얻어야하는 것이라는 서장의 ‘유소득심’처럼 내가 계속 삶을 벗어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마음을 항상 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으나 ‘소임 잘 살고 남 애고롭게 하지 말라’는 말과 ‘지금 이 순간 오직 할뿐’이라는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대중스님 여러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한번쯤은 해 보셨을 겁니다. 나는 아주 오랜 세월을 육도윤회를 하면서 살아왔고 부처님 당시 수행자로서 부처님의 제자였으며 죽어서 또 여러 모습으로 살았고 비구로 출가도 했을 것이고 불교와 전혀 인연 없이 살았을 수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생각, 지극한 발원’을 해서 어렵게 어렵게 다시 사람의 몸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이곳에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운문사의 청풍료, 나를 이곳까지 이끈 것은 과연 무엇인지 정말 한 생각 지극한 발원으로 이 자리에 있다면 저는 또 다시 한 생각 지극한 발원을 하며 정말 내가 누구인지를 찾고 싶습니다. 이 순간 지금 여기가 나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기 위한 항상 깨어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중스님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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