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사경 수행 -진홍스님-

가람지기 | 2008.04.06 16:11 | 조회 3272

안녕하십니까? 대교반 진홍입니다.


어떤 이는 잔인하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어딘가로 떠나야만 할 것 같다던 4월입니다.

하늘과 땅이 살짝 위치만 바꿨을 뿐인데 만물은 그 기지개에 부산함을 떨고, 우리들도 살랑살랑 불어오는 4월의 바람을 맞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게 됩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새벽 찬바람에 올해는 봄이 오지 않으려나 했더니 재촉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찾아드는 운문의 봄...

저는 어느덧 4번째 봄을 맞이하며 화엄회상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

크고 방대한 경의 현묘한 이치는 다 알지 못하여도 그 이름만으로 깊은 환희심을 낼 수 있는 대승경전의 찬란한 꽃입니다. 80권이나 되는 그 방대한 분량은 넘겨보는 인연조차 만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운문사 강원에서는 전국의 많은 강원중에서도 유일하게 80화엄을 다 보는 수승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설사 80권 화엄경을 정확히 새기며 모두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이근(耳根)에 스치는 공덕이라도 만들어 주시려는 생각에서 80화엄을 다 보는 전통이 생기지 않았나 봅니다.


대교반이 되자 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많은 스님들이 화엄경 사경에 열중하고 있지요. 화엄경사경~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바로 이 사경일 것입니다. 80권을 다 쓴다는 것이 어디 보통일이겠습니까? 꼬박 잡아야 무리 없이 쓸 수 있는데 하루 종일 앉아서 쓴다 해도 10장을 넘지 못하니 오로지 기도한다는 일념으로 사경을 할 뿐입니다.


사경은 부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행함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사경수행만큼 지금의 나의 마음상태를 정확하게 살펴 볼 수 있는 수행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나태한 마음, 어리석은 마음이 일면 눈앞의 사경으로 바로 나타나서 나의 공부가 어떻게 진전되어 가는지 순간순간 직접 점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는 부처님께서 몸소 행하셨던 사경수행법을 설해주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발심한 때로부터 정진하여 물러나지 않으시고 수없이 많은 몸과 목숨을 보시하고 살갗을 벗겨 종이를,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사경하기를 수미산만큼 하였다.”

법을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사경을 위해 목숨조차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처음 사경을 접해본 행자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사경을 하다가 팔이 아프다는 핑계로 조금 쉬려고 경을 펴둔 채 다른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노스님께서는 경에는 수승한 공덕이 있기에 호법신장님들이 경이 펼쳐져 있으면 덮을 때까지 무릎 꿇고 합장하며 앉아 있다고 경책을 해주셨습니다. 정말 아차 싶었습니다. 조금의 게으름에 경을 보는 기본도 지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단순히 사경을 한다고 해서 수행이 되는 것이 아니구나. 진리를 소중히 하는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경전을 여법하게 지니고, 진실한 사경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경들이 그러하겠지만 가장 높고 깊다는 화엄경에는 얼마나 많은 불법대중이 옹호하고 계실까 생각하니 옛 선인들께서 목욕재개하고 경을 펼치신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경을 사경하는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일체법계 모든 불보살님들과 중생들이 함께 함에 어떻게 함부로 경을 대하겠습니까?


강원생활 4년 중에 어쩌면 가장 편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1년입니다. 하지만 이 1년을 아무도 편안히 쉬려고 하지 않습니다. 강원에서 화엄경을 보는 동안 사경을 회향하기 위해 오늘도 역시 구슬땀을 흘리며 밤낮으로 삼장원을 향하는 스님들... 열심히 사는 반스님들의 모습을 보며 자꾸만 나태해지는 저의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단번에 보살의 제 팔지에 올라 하늘의 향내를 피우고 서유기의 손오공처럼 신통을 부리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간경과 사경의 공덕이 부처가 되는 수행의 한 분상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어렵고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신심을 쉬지 않고 청정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살아가는 대중스님들... 그리고 오늘도 여법하게 사경하는 도반스님들 곁에 함께하는 호법신장님들의 옹호로 아무 장애 없는 1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중스님~ 수행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밖으로 눈을 돌리지 말고 안으로 나를 살펴 더욱 삶에 충실한 수행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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