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수행:일상의 파도타기 -일혜 스님-

가람지기 | 2007.12.15 13:38 | 조회 3271

“若離日用하고 別有就向則是는 離波求水며 離器求金이라 求之愈遠矣리라. 만약 일상생활을 떠나 따로이 향해 나아갈 바가 있다면 이는 파도를 여의고서 물을 구하는 것이요, 그릇을 떠나서 금을 구하는 것이라, 구할수록 더욱 멀어질 뿐이니라.”

안녕하십니까? 사집반 일혜입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은 대혜 스님의 서장의 한 구절입니다.

바다로부터 그 바닷물의 일렁임으로 만들어지는 파도를 오려낼 수 없듯이, 깨달음은 일상 속에서 찾아져야 하고 수행은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누누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일상’이라는 것을 들여다볼라치면 우리는 가슴이 답답해지고 급기야 호흡이 곤란해지곤 합니다.

우리는 한 때 저마다 가지고 있던 ‘일상’을 그것이 무지몽매하고 부조리하다는 이유로 싹둑 베어내고 출가라는 것을 단행하였습니다. 굳이 이런저런 아픔과 슬픔을 감내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비장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가 맞닥뜨린 것은 또 하나의, 여전히 무지몽매하고 부조리하면서 그 종류만 약간 달리할 뿐인 ‘일상’이었습니다. 깨달음이 일상의 밖에 있을 수 없고 수행이 그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면, 우리가 매몰차게 내다버린 ‘저’ 일상 속에서도 추구할 수 있었을 것을, ‘이’ 일상을 굳이 선택한 것은 무엇으로 정당화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이’ 일상이라고 해서 결코 깨달음에 더 근접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왜 지금 여기에 남아있습니까?

행자 때였습니다. 사시공양 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끝도 없어 보이는 그릇 더미에 파묻혀 설거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저항할 수 없는 졸음이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눈꺼풀을 가눌 수 없는 순간, 손에서는 어른 스님용 사기그릇이 자꾸 미끄러져 나가려 했고, 그 때마다 깜짝 놀라 손에 애써 힘을 주어 그릇을 잡을라치면 곧 깨어질 듯한 두통이 동반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졸음 속으로 빠져 들고...이렇게 졸다가 깨기를 그 때 느낌으로는 약 백만 번 정도 계속하는 동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짜증은 곧 졸고 있는 뇌의 한 쪽 구석에서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비판의 엔진! 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가동시켰습니다. 거의 90%에 가까운 시간과 물자와 기력을 오직 하루 세끼 공양을 위해 쏟아 붓는 실태 하며, 먹고 일하는 것에 관해서만 경책하고 서로를 탁마하는 분위기, 공양물과 음식물의 양을 조절하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시스템, 특히 수행자로서의 건강관리는 고사하고 행자라면 누구나 감당해야 하는 늘어만 가는 몸무게에 생각이 미치자 불쾌한 포만감과 더불어 분노는 증폭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저 굶고 있는 도시 빈민과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아! 이 이상한 집단의 체제 유지에 동참하고 그 뒷설거지를 하느니 차라리 저 도심의 무료급식소나 아프리카로 가서 한평생 이름 없이 설거지를 하는 편이 훨씬 의미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결심이 순식간에 확고부동해졌습니다. 이제 당장 고무장갑을 보란 듯이 벗어 던지고 어디로든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몰록! 잠이 깨었습니다. 설거지통과 그 속에 담겨진 그릇들과 고무장갑을 낀 양 손과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요란하고 희뿌연 진동을 일시에 멈추었습니다. 저는 마치 세상에서 그런 풍경을 처음 보기나 하듯이 접시들과 비눗방울들의 선명한 자태를 바라보았습니다. 손가락에 애써 힘줌이 없이, 아무런 두통이 없이 안전하게 잡아서 하얗게 부서지는 물줄기들 사이에서 하나씩 헹궈내고 헹궈내고...그렇게 그렇게 설거지를 마쳤습니다. 나 자신을 개선하고 일상을 개선하는 힘은 원망이나 자책, 증오나 연민, 회한과 걱정 등의 감정들로부터는 절대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좌충우돌하며 또 다른 일상의 얼룩을 만들어갈 뿐만 아니라, 보다 심각하게는 무엇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정확하게 파악조차 하지 못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많은 얼룩들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되 또한 늘상 일상을 여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대혜 스님의 말씀을 잘 새겨보아야 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일상 앞에 서서 늘 이것이 내게 가치 있는지, 중요한지, 의미 있는지, 이로운지, 적성에 맞는지....한 마디로 내 스타일인지를 끊임없이 평가하고 판단하고자 할 때 일상은 없고 오직 우리 자신만 있습니다. 일상을 여의지 않는다는 것은 매순간 일상을 평가하려고 덤벼드는 사심 가득한 나의 의지를 무화하는 것입니다. 가장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고 재미없어 보이는 일들에조차도 그것이 나의 일상의 파도로 닥쳐온다면 묵묵히 집중하고 집중해서 세밀한 구석까지 정성을 들이는 것이 일상을 여의지 않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집중해서 정성을 들이는 동안 그 집중하는 대상의 수승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간절함에 의해서 힘이 쌓여 가기 때문입니다.

지금 배우고 있는 치문과 서장, 절요 등에서 지혜는커녕 지식조차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계속 마음을 집중하여 머무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집중하지 못한다면, 저 세련된 표지와 감각적인 문구들로 도배된 책들 속에서 백만 개의 불교 정보를 축적한다 할지라도 다만 종교문화상품 소비자로 전락할 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졸고 있다면 아프리카의 어린이에 대한 연민이 아무리 크다 한들 허영심일 뿐입니다.

어릴 적 바닷가에서 파도 넘기를 해 보신 분이라면 잘 아실 것입니다. 수영을 잘 한다면 그깟 파도쯤이야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좀 다릅니다. 얼결에 물이 턱 밑까지 찰랑거리는 깊은 지점에 갔다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높은 파도에 당황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거침없이 다가오는 파도가 무서워서 만약 등을 보이고 해변가로 도망가려 한다거나, 그저 온 몸에 힘을 주고 파도를 노려보며 버티고 서 있기를 하다가는 파도에 휩쓸려 짠 물을 한바탕 들이키기 일쑤입니다. 파도에 넘어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다가오는 속도와 높이를 잘 관찰해서 정확히 그것이 내 몸을 통과하려는 찰나에 파도의 리듬에 맞추어서 몸을 살짝 띄워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온전히 파도에 맡겨야 합니다. 온 우주가 흐름을 멈춘 듯한 몇 초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치 맘씨 좋은 파도가 실어 날라준 듯 내 두 발은 안전하게 착지해 있습니다. 밀려오는 파도를 타 넘으면서, 파도를 거슬러 먼 바다로 유영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그 날까지! 대중스님들. 애쓰고 또 애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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