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4성제-혜중스님(화엄반)

운문사 | 2006.06.13 16:42 | 조회 3225

안녕하십니까? 화엄반 혜중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시고도 법을 설하기를 망설였다고 합니다. 저도 망설였지만 피해갈 수 없는 법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법문이란 진리에 이르는 문, 중생을 열반에 들게하는 문이란 뜻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4성제에 대해 설하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후 설하신 법문이 끝없이 많지만 이 모든 법문이 사성제에 섭수될 수 있으며, 우리가 부처님께 받은 가르침이 사성제라는 것에 대해 다른 의견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성제를 알기가 어려운 것을 중아함경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성제를 진실 그대로 아는 일은 한 가닥의 털을 백 올로 나누고 백 올로 나뉜 털 한 올마다 화살을 쏘아 맞히는 것보다 더 어렵다.”

또 잡아함경에는 “저 눈먼 거북과 나무 토막은 비록 서로 어긋나지만 간혹 서로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범부가 오취에 떠돌면서 사람 몸을 잠시라도 받기는 저보다 더 어렵다. 왜냐하면 저 중생들은 도리를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고 善을 행하지 않고 서로 죽이고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침범하는 등 한량없는 악을 짓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사성제에 대하여 아직 조금도 미혹됨 없이 밝게 알지 못했다면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밝게 알기를 배워라” 하셨습니다.


다음은 부처님이 4성제를 설하시는 이유를 설명한 중아함경의 말씀입니다.

‘말룽기야풋타’라는 불제자가 명상을 하다가 한 날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여래께서는 ・ 세상은 영원하다든가

・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든가

・ 세상은 유한하다든가

・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든가

・ 영혼은 육체와 같다든가

・ 영혼은 육체와 다르다든가

・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든가

・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다든가

・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든가

・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든가,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못마땅하고 이해할 수 없다. 여래께 여쭤봐서 설명하지 않으신다면 나는 배움을 포기하고 세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받은 부처님께서는 “내가 그대에게 그런 것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이렇게 물으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설명해야 비로소 여래 밑에서 청정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여래에게 대답을 못들은 채 이러한 문제와 함께 죽어갈 것이다. 마치 독화살에 맞은 사람을 의사에게 데리고 갔는데 그는 ‘나를 쏜 사람이 누구며 활과 화살의 재질을 알아야 이 화살을 뽑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알기도 전에 죽는 것과 같다.


말룽기야풋타여

‘세상은 영원하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그러한 견해와 상관없이 태어남이 있고 늙음이 있고 죽음이 있고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이 있다. 나는 그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들을 지금 여기서 파괴할 것을 가르친다.

나는 설명해야 할 것은 설명하고 설명하지 않아야 할 것은 설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왜 그것을 설명하지 않는가? 그것은 유익하지 않고 청정한 삶과는 관계가 없으며 멀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멈추고, 삼매에 들고 올바로 원만히 깨닫고,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설명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왜 그러한 것들을 설명했는가? 그것은 유익하고 청정한 삶과 관계가 있으며, 멀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멈추고 삼매에 들고 올바로 원만히 깨닫고 열반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항상 현실적인 苦에 대한 바른 인식을 통해 원인을 끊어 苦의 滅의 증득을 위해 8정도의 실천인 4성제의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다음은 4성제를 설명한 경전의 말씀들입니다.

먼저 괴로움의 진리란 태어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늙는 것도 괴로움이며, 병드는 것, 죽는 것, 원수와 만나는 것,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며,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며, 오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도 이것은 괴로움에 대한 진리이며 성인이 바르게 깨달은 바이기에 설하신다 하셨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거룩한 진리란 미래의 다시 태어남으로 이끌고 환희와 탐욕을 수반하여 여기저기 즐거워하는 갈애 곧(탐욕의 마음, 망령된 집착) 이를테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 이것을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거룩한 진리라고 합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거룩한 진리란 그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소멸하여 버려지고, 집착없는 해탈이 있는데 이것을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거룩한 진리라고 합니다.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거룩한 진리란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의 8정도를 말합니다.


정견이란 괴로움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생성원인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알면, 이것을 정견이라 합니다.

정사유란 이러한 정견을 바탕으로 욕망, 분노, 폭력을 여윈 사유를 말합니다.

정어란 정견, 정사유를 바탕으로 거짓말, 이간질, 욕된 말, 꾸며대는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업이란 정견, 정사유, 정어를 바탕으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고 청정하지 못한 삶을 영위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명이란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을 바탕으로 잘못된 생활을 버리고 올바른 생활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정정진이란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을 바탕으로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한 불건전한 상태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노력하면 이미 생겨난 불건전한 악한 상태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아직 일어지 않은 건전한 상태를 일으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이미 생겨난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여 잊어 버리지 않게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정념이란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을 바탕으로 정근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몸, 느낌, 마음, 법의 관찰을 행하는 것입니다.


몸에 대해서 관찰한다는 것을 예를 들어보면,

걷거나, 서있거나, 앉거나, 자거나, 깨어있거나, 말하거나, 침묵할 때나, 어떠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주의 깊게 세밀히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 정념 즉 바른 새김에서는 신수심법의 관찰을 통해 그들의 속성에 대해 오직 분명히 알아 차리는 것입니다.

정정이란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을 바탕으로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의 선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괴로웠기에 깨달음이 필요했다는 부처님께서는 “출가 수행자가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하는 까닭은 오직 열반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열반이야말로 긍극적인 것이며 수행의 마지막 목표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상, 무아의 진리 속에서 중생은 苦를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苦를 알아 진리를 깨쳐 열반을 증득한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 말씀대로 “아직 조금도 미혹됨이 없이 밝게 알지 못했다면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밝게 알기를 배워야 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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